감리교 인물 DB 황애덕(黃愛德, 1892. 4. 19~1971. 8. 24)


농촌계몽운동가. 호는 송산(松山). 세례명 에스더(Esther)

평양 외성(外城)에서 유학자이며 한의사였던 황석청과 전도부인 홍유례 사이의 2남 6녀 중 넷째 딸로 출생. 어렸을 때 이름은 확실, 또는 간레(가운데)였다. 그의 어머니가 황애덕의 동생인 신덕을 낳고 사흘 동안이나 후산을 못하여 생명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아버지가 한방으로 고치지 못하고 낙담하고 있을 때 이웃 사람의 권유로 의사인 홀 부인(R.S. Hall)을 찾아가 무사히 후산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황애덕의 부모는 평양 남산현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어린 딸 3형제도 유아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황애덕이 6살 때의 일이었다.

그의 어머니 홍유례는 홀 부인에 의해 생명을 건진 뒤로 홀 부인이 경영하는 여성의료기관인 평양부인병원에 나가 10여 년을 병원에 온 환자들을 위로하고 전도하는 일을 하는 한편 이후 평양 애국부인회의 재정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한 애국자였다. 황애덕은 일찍부터 개화의식을 가진 아버지와 신앙이 독실하였던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하였다.

황애덕은 노블 부인이 1896년에 시작한 북지방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감리교 계통의 소학교였던 평양 정진소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으며,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다. 학교에서 황애덕은 머리가 좋고 진실하며 매사에 열과 성의가 있고 창의성과 지도력이 뛰어나 급우들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황애덕은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평양에 내려가 숭의여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는 1913년 같은 학교 교사였던 이효덕(李孝德)ㆍ군수집 며느리로 권세 있는 집안 출신 교인이었던 안정석(安貞錫)ㆍ숭의 출신으로 평양 숭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있던 김경희(金敬姬)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항일 비밀결사대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먼저 상급반 학생들로 \"송(松)형제회\"를 조직하였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주로 하급반) 학생들로 별도로 \"죽(竹)형제회\"를 조직하였다. 이 둘을 합해 \"송죽형제회\"라 부르게 된 것이다. 황애덕은 이듬해 이화학당 대학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강의를 받고 평양에 내려와 기홀병원에서 의학공부를 1년간 하였다. 또한 황애덕은 그로 하여금 의학도가 되기를 바라는 홀 부인의 간곡한 권유로 서울 총독부 의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 1년간의 청강을 마치고 평양 숭의여학교에 다시 내려와 3년 동안 교사로 지내며 송죽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8년 황애덕은 일본 동경 우시고메에 있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경 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황애덕은 1919년 2월 8일 동경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거행된 2ㆍ8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주동학생으로 검거되었다가 훈방되었다. 그 후 김마리아ㆍ송복신 등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국내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하였으며 김마리아와 이화학당 교사인 박인덕ㆍ신줄려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 진행시켜 나갔으며 3월 19일 추적해 온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8월 5일 출감하였다. 출감 후 황애덕은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새롭게 정비하기 위하여 9월 19일 회합을 가졌으며 총무로 선출되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과거에 조직된 국내의 모임은 물론 상해와 하와이 미국 각지에 만들어져 있는 모든 여성 애국단체를 통합하기로 하였으며 황애덕은 일체의 사무를 담당하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는 12월 28일 검거 선풍이 일어 조직이 새롭게 정비된 지 몇 달 만에 일경에 의해 발각되었으며, 황애덕은 5년의 구형 3년의 판결을 받고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2년 가출옥한 후 황애덕은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모교의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사업기관인 태화여자관의 야학 선생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여름 황애덕은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1928년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서 농촌사업을 연구하였으며 1928년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신학생들이 농촌으로 가기를 꺼리니 그들을 꼭 계몽시켜 주시오\" 하면서 교수로 초빙하는 협성여자신학교 채핀 교장의 부탁을 받아들여 귀국하자마자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감리교신학교 안에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신설하고 농촌사업 지도자를 육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그에게 감화받고 농촌운동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한 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특히 그가 길러낸 제자 중 김노득(金路得)과 최용신(崔容信)은 일생을 농촌운동에 몸바친 훌륭한 농촌계몽운동가들이었다.

1928년에 시작한 농촌계몽운동은 16년간 꾸준히 계속되어 여섯 개의 학교와 두 개의 교회를 세웠고, 이르는 곳마다 강습소와 예배처소 등을 마련하였다. 황애덕의 농촌계몽운동은 국외로까지 확장되어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동포들을 모아 \"경성현\"이란 한인 농장을 건설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다. 그는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썼으며 부지런히 일하고, 전도하며 농장을 키워가던 중 2차대전으로 3년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해방 후 황애덕은 YWCA연합회 이사로 취임하는 한편 당시 여성단체를 총망라한 \"여성단체총협의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미군정청 성인교육국의 재교육과장으로 취임하여 국민교육사업의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9년 드루대학에서 1년간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950년 한국기독교여자절제회 대표로 활동하였다. 1951년 여성단체총연맹에서 활동하였으며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한미 기술학교를 경영하였다. 또한 희망원을 창설하여 전재(戰災) 미망인들에게 간이 기술을 가르쳐 갱생의 길을 열어주었으며 절제회를 전국적으로 갱생시켜 활동하였다. 미국에 거주 중 1971년 78세로 별세하였다.

-논문:\"대구 여감의 0141호\", 〈동광〉, 1931. 10;\"3.1운동과 여성의 활약\", 〈신천지〉, 1946. 3;\"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의 유래와 상황\", 《한국절제운동 70년사》,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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