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홍현설(洪顯卨, 1911. 9. 21~1990. 11. 14)


신학자. 호는 청암(靑岩)

평남 평양에서 홍대원과 김신원 사이의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조부모 때부터 독실한 장로교인으로 그도 유년시절 평양 장대현교회에 출석하였다. 장대현교회 부속 숭덕학교를 거쳐 1929년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 광성고등보통학교가 감리교 학교였기 때문에 이 학교에 다니면서 감리교회로 옮겨 채관리교회에 출석하였다. 목회자가 될 결심을 하고 서울의 감리교신학교에 진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다(제1회).

졸업한 그 해 신학교 부교장 채핀(A.B. Chaffin, 채부인)의 후원으로 일본에 유학, 칸사이학원 신학부 본과에 편입하여 1935년 졸업하였다. 그 해 감리교신학교 1년 후배인 최영희와 결혼하였으며 1년간 동지사대학 신학부에서 연구하였다. 1936년 귀국하여 진남포 온정리교회 전도사로 부임, 목회를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덕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던 중 총리원 전도국 파송으로 새로 개척된 신의주교회 초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교회를 크게 발전시켰다. 1939년 서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해 평양 요한성경학원(후의 요한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1942년 3월 서울의 감리교신학교 조교수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으나 1년 만에 교수직뿐 아니라 교단에서도 목사직을 파면당하였다. 이는 당시 친일의 길로 가던 정춘수 목사의 혁신교단정책에 적극 반대한 데 원인이 있었다. 그는 혁신교단 총회가 열리기 한달 전인 1943년 9월경 일경에 검속되어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88일간 옥고를 치르다 병을 얻어 풀려났다. 이후 그는 평남 광량만으로 은신하였고 그곳 광량만교회 교인들의 요청으로 강단을 지키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목사직에 복직되어 평양중앙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동시에 조선민주당의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중 공산당의 박해가 심해짐에 따라 1946년 월남하였다. 월남 후 류형기 목사를 도와 문서사업에 잠시 참여했다가 그 해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이후 1977년 정년 은퇴하기까지 감리교신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48년 미국에 유학, 드루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고 1951년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6.25전쟁 때 귀국하여 부산에 피난중인 감리교신학교 교장서리를 거쳐 1953년 정식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휴전 후 1954년 신학교를 서울로 옮겼으며 1959년 신학교가 신학대학으로 승격되면서 그는 초대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예배실인 웰치기념강당과 여자기숙사를 교내에 신축하였으며, 1960년 화재로 본관 교사가 소실되자 곧바로 건축에 축수, 그 해 10월에 현대식 3층 교사를 완공시켰다. 4.19학생의거와 5ㆍ16군사혁명 등 사회의 격동기를 맞으면서도 꾸준히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에 주력해 23년간 1천 2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는 한국의 감리교회뿐 아니라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1956년 그는 한국 감리교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한 것을 필두로 감리교세계선교위원회(아프리카 콩고, 1961), 세계기독교연구회 분과위원회(아일랜드, 1962), 세계감리교신학자대회(영국, 1962), 아시아감리교대회(말레이시아, 1964), 세계YMCA대회(영국, 1960), 세계감리교대회(미국, 1971) 등에 참석하였으며, 1965년 서독 정부 초청으로 서독의 학술시설을 시찰하였고, 1968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교회 60주년 기념 교역자수양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 외에 1965년 한국기독교연합회(현 KNCC) 회장, 전국복음화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장(1966~1970),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1967~1970), 대전여자대학 이사장(1974~1990)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1984년 한국기독교교육선교연구원 원장, 감리교대학 이사장, 배재대학 이사, 한국세계기독교선명회 이사, 세종대학 이사(1972~1990)로 활약하였다. 199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저서:《홍현설 전집》.
목록
Loading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