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홍에스더(洪愛施德, 1892. 4. 25~1975. 10. 8)


여성운동가

서울 새문안에서 홍정후(洪正厚)와 한메리 사이에서 장녀로 출생. 부친 홍정후는 개신교 선교 초기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은 후 한국 교회 초기 지도급 인물로 활약하였고 갑오개혁에 중진으로 활약한 개화 선구자였다. 이 같은 집안의 영향으로 홍에스더는 일찍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1912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였고, 졸업 즉시 이화보통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교육가로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1917년 이화학당 대학 본과에 진학하여 1922년 졸업하였으며 대학 본과에 수학하면서 만주에 세워진 무관학교를 지원할 목적으로 여성들이 중심된 동지회를 결성하고 이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3.1운동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신 1920년 6월 이화학당 교사\"학생 7명으로 \"이화 7인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강연을 열었다. 김활란(金活蘭)ㆍ김함라(金含羅)ㆍ윤성덕(尹聖德)ㆍ김폴린(金保麟)ㆍ김애은(金愛恩)ㆍ김신도(金信道) 등이 그때 동지였다. 1922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1923년 미감리회 여선교사 채핀(A.B. Chaffin) 및 월터(A.J. Walter)의 후원을 얻어 미국 테네시 주 스카릿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홍에스더는 그 해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취임하는 한편 1927년에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회장으로 취임하여 교육과 여성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27년 4월 신간회의 자매기구 형태로 만들어진 여성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5월에 열린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근우회는 1927년 2월, 3.1운동 이후 일제의 민족운동세력 분열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때에 청년ㆍ학생ㆍ종교인ㆍ노동자ㆍ지식인 계층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념으로 신간회가 조직되자 이에 맞물려 여성계에서 결성한 민족운동단체였다.

1930년 12월 남.북감리교회가 합동을 이룩함에 따라 미감리회의 내외국여선교회와 남감리회의 여선교회도 합동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홍에스더는 최활란과 함께 미감리회 합동 실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 때는 미감리회 평신도 총대의 자격으로 총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남.북감리교회 여선교회가 연합한 \"기독교조선감리회 여선교회\"가 구성되고 1931년 6월 정동교회에서 제1회 여선교회 대회가 열렸는데 홍에스더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해방되기까지 역임하였다. 그 외에 감리교 총리원 이사(1935), 감리교신학교 이사(1937), 서울여자기독교청년회 총무(1934)를 역임하였다. 1935년 YMCA 운동가인 이명원(李命遠)과 결혼하였고, 결혼 후에도 계속적으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는 재건된 여선교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49년 5월에는 총리원 부녀국 총무로, 1953년 부녀국에서 여선교회로 명칭이 환원된 대전대회에서 총무로 다시 선출되었다. 또한 한국감리교여선교회가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의 정식회원이 된 1956년, 미국 레이크주 날루스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6년 정동제일교회 장로로 취임하였으며 말년은 교회 봉사에 헌신하였다.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동창회에서 40년 교회 및 사회봉사 근속 표창을 받았고, 1973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표창을 받았다. 1975년 서울 자택에서 별세하였으며, 1978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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