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홍병선(洪秉琁, 1888. 12. 7~1967. 7. 19)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선비 홍태준(洪泰俊)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했고 서울에 있던 신교육기관 경성학당에 입학하였다. 경성학당은 1899년 일본기독교도교육회에서 세운 일본식 학교로 학당장은 조합교회 목사 와다세였다. 아마도 홍병선은 이 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1902년경). 1905년에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3년 후에는 일본에 유학, 동지사(同知社)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11년에 귀국하여 와다세가 설립한 한양교회 전도사가 되어 목회를 시작했다. 1916년 남감리회 조선매년회에서 정식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1925년에는 본처목사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라기보다는 교육가ㆍ사회운동가로 크게 활약하였다. 1911년 이후 보성전문학교 교사를 겸임했고 1917년에는 피어선성경학원 학감 겸 교사를 거쳐 1918년 12월부터 배화여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한국 여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너(배화)를 사귀기 전에는 \'여자교육\', 아니 \'신여자\'에 대하여 색안경을 쓰고 보는 자이요, 아지 못하고 악평만 하였고 단처만 보고 욕하는 자였다. 그러나 너를 사귄 이후로는 나의 오해가 풀리고 악평을 점차로 덜하게 될 뿐 아니라 금일 이 과도 시대에 처한 신구사상의 표점에 선 너를 위하여 무한한 동정을 가지게 되었다. 여자교육과 신여자에 대하여 오해하는 자를 만날 때마다 너를 위하여 변호에 힘쓴다.\"
1920년 12월 신흥우의 권유로 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간사로 일터를 옮긴 그는 이후 별세하기까지 40년 이상 YMCA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특히 1925년 농촌부 간사가 되면서 YMCA의 농촌운동을 주관하는 실무자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농촌운동가 홍병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농촌운동은 1927~1928년 덴마크 및 미국의 농촌사업을 시찰하고 온 뒤에 본격화되었다. 이 여행을 통해 무엇보다 크게 깨달은 것은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지도자가 농촌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 직후 〈청년〉(1928. 11)지에 기고한 \"지도자와 농촌\"이란 글이다.
\"지도자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은 다수 민중을 자기 영웅 노름에 대개는 희생할지언정 자기를 위하야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일가, 일단체, 일촌 내에 이미 영웅은 많다. 이제는 참된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이다. …… 일촌 중에 무명씨로 뭇쳐서 그 촌민 전체의 생활과 정신을 위하야 노력하는 지도자야 누가 세상이 알겠는가? 신문잡지에서 일흠을 들날리며 아모아모라고 사회에 불러주는 맛에 엇개바람이 나서 도라다니는 명사가 영웅이라고 불느면 가하나 지도자라고야 감히 부를 수가 있겠는가?\"
즉 그는 신문 잡지에 이름을 날리며 사회에서 알아주는 바람에 어깨 바람을 휘날리며 다니는 영웅적 농촌운동가가 아니라, 구석 촌바닥에 묻혀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정신을 깨우쳐주는 참 지도자로서의 농촌운동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러한 운동가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농촌협동조합 및 농촌센터(구락부) 조직에 있다. 농산물의 생산부터 수확 및 판매에 이르는 일련의 유통과정 속에서 농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며 협동을 통한 자구와 자생의 길을 모색하려는 데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29년 당시 전국 농촌협동조합 49개, 농촌센터 90개에 불과했던 것이, 1930년대 초반 한창 번창할 때는 협동조합이 7백 30개, 농촌센터가 3백 20개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편 그는 1930년 남.북감리교회 합동을 위한 특선위원으로 활동하며 \"복음적, 진보적, 토착적\" 교회를 설립하도록 노력하기도 했다. 또한 1931년 그는 덴마크에서 보고 온 선진 농촌사업을 실천하기 위해 신촌에 고등농민수양소를 마련, 사람과 가축이 함께 기거하는 농막을 짓고 개량식 농법을 소개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의 농촌 청년들을 교육시켰고, 이후 이러한 유형의 농민학교가 전국에 확산되어 1932년 당시 서울 근교에만 1백 50개 촌락 중 39개 촌락에 농민학교가 있었다.
그의 농촌운동은 단순한 잘살기 운동이 아니었다. \"참사람 만들기 운동\"이었다. 한창 농촌 청년들의 이농현상이 문제가 되던 1930년대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오늘날 농촌문제를 많이 떠드나 그 마음을 고쳐주지 않고 돈을 준다든지 땅을 준다든지 하드래도 그 마음에 결심하고저 하는 준비가 없으면 밑빠진 시루에 물붓는 것같이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 먼저 농촌 청년에게 그 정신을 바로잡아 주면 농촌에서도 살 길이 생기고 잘살게 될 것이다. 도시 청년도 먼저 그 마음을 바로잡아 주어야 잘살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이 틀리면 농촌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요, 도시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다. …… 자식이, 불쌍하다고 돈만 주지 마라. 일부러 고생을 시켜서 돈 한푼이라도 얻으면 그것을 자기가 이용하고 늘려서 살 계획을 차리는 사람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오늘 사회나 농촌이나 어디를 들여다보든지 \"참사람\"이 없는 것이 걱정이다.\"(\"농촌생활과 도시생활\", 설교52편, 1937)
그러나 YMCA 농촌운동도 1935년 일제의 압력으로 신흥우가 사임하면서부터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1938년에는 농촌부가 폐쇄되어 그의 농촌운동은 여기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청년회학교(영창학교로 개명) 교장이 되어 불우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실업교육을 실시하였지만, 이 사업은 점차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과 전쟁수행 목적에 영합하는 프로그램으로 변질되어 갔다.
해방 후 직접 YMCA운동에 뛰어들진 않았으나 계속 YMCA와 관계를 맺으면서 보린회 이사장(1945), 성인교육중앙총본부 부회장ㆍ회장(1946), 농림부 농림위원(1957), 국민대학ㆍ중앙신학교 강사 및 농업협동조합 고문(1954), 중앙YMCA 명예회장(1963) 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한국 YMCA 역사 편찬을 위한 사료수집과 집필에 몰두하던 중 1967년 별세하였다. 부인 홍은경(洪恩卿)은 정신여학교 출신으로 태화여자관, YWCA, 절제회 등을 통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사학자 홍이섭(洪以燮)이 그의 아들이다.
-저서:《정말(丁抹)과 정말 농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