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홀(William James Hall, 1860. 1. 16~1894. 11. 24)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홀(忽) 또는 하락(賀樂)

캐나다 오타리오 주 글렌 뷰엘(Glen Buell)에서 아버지 조지 홀(George Hall)과 어머니 마가리트(Margaret)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남.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의 청교도적 장로교인이며 석공이었다. 경건한 신앙 가문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남다른 열심이 있었으며 1873년 14세 때에 중생을 체험하였다. 1881년에 아덴(Athen)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교사자격증을 얻어 2년간 교직에 봉사하였다. 1885년 온타리오 주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YMCA 지부를 조직하고 청년운동에 힘썼다. 1887년 \"해외선교자원학생운동\"의 인도지역 책임자인 포먼(J. Forman) 목사가 퀸즈대학에 와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교사로 지원하였고, 선교사 지원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생자원회\" 활동을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같은 해 여름 매사추세츠 주 노드필드에서 개최된 무디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국제의료선교협회(International Medical Missionary Society) 이사 도우넛(G.D. Dowknott)을 만나 뉴욕의 벨레뷰(Bellevue)의과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1899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미감리회에서 하는 뉴욕 빈민가의 선교사업에 참여하여 메디슨가의 의료선교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이곳에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 출신의 여의사 로제타(Rosetta Sherwood)를 만나 이듬해 약혼을 하였다. 1890년 8월 약혼녀 로제타가 먼저 한국 의료선교사로 출발하였고, 그는 1년 후인 1891년 12월 미감리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나왔다. 원래는 중국에 의료선교사로 나가기로 되었다가 극적으로 약혼녀가 있는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1892년 3월 그는 존스(G.H. Jones) 선교사와 함께 북한지방 순회여행에 올라 개성, 서흥, 대동, 평양, 의주까지 여행한 후에 자신의 선교구를 평양으로 정할 것을 굳힌다. 같은 해 6월 27일 서울에서 올링거(F. Ohlinger) 목사의 주례로 로제타와 결혼하여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같은 해 9월 평양을 또다시 다녀온다. 1893년 2월 노블(W.A. Noble) 선교사와 함께 또다시 평양 및 평안도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이 여행에서 평양 서문통에 한옥 한 동을 구입하여 북한지역 선교의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평양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감리교회가 처음이었다. 1894년 1월 김창식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구입한 한옥에서 교회, 의료, 교육사업을 동시에 시작하였는데, 교회는 남산현교회로, 학교는 광성학교(광성소학교, 광성중ㆍ고등학교, 처음에는 격물학당)로, 병원은 평양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개척 선교사업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돈을 빼앗으려는 불량배들(발피 김낙구의 아들 김호영)의 행패도 당해야 했고, 1894년 5월에는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閔丙奭)과 평안감사 신덕균(申德均)이 홀의 조사인 김창식을 비롯한 장로교의 한석진 등을 연행하여 사형시키려는 사건도 일어났다. 1894년 5월 8일 홀의 부인과 갓난아이인 아들이 평양에 왔을 때, 서양인 남자들은 여러 차례 보았으나 서양인 여자나 아기는 처음이었던 평양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홀은 할 수 없이 이튿날부터 10명씩 조를 짜 5분씩 방안에 불러들여 자기 아내와 아기를 구경시켜 주어야 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어 적잖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홀은 평안감사에게 찾아가 질서를 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이 무렵 평양 관아에서 음모가 꾸며지는데, 전 해에 돈을 거두려다 실패한 김호영이 나섰다. 그는 평양 관아의 하급관리였다. 김호영은 치안의 문제를 내세워 평안감사 신덕균을 부추겼고, 신덕균은 다시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교인 체포를 건의하였다. 이에 민병석은 \"서양사람은 잡을 수 업슨즉 조션교인만 잡으라\"고 지시를 내렸다. 중앙정치 판도에 예민한 민병석은 선교사를 체포함으로 야기될지도 모를 한ㆍ미 양국간의 외교적 마찰이 두려웠던 것이다. 민병석의 명령으로 교인 체포가 이루어졌는데 1894년 5월 10일 새벽이었다. 교인 체포의 명분이야 \"이교(異敎)를 수입하여 다수의 양민을 유혹(誘惑)하게 하며 외인으로 협잡(挾雜)하는 류를 방지하여 금지하는 것\"이었지만 지방 관리들은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 더 컸다. 포졸들은 홀에게 사람을 보내 돈 10만 냥만 내면 모두 석방하겠다는 기별을 여러 차례 보냈다. 날이 밝자 홀은 평양 관아로 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민병석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홀은 투옥된 사람을 면회하고 귀가하였다. 서울에 스크랜턴에게 이 사건을 알려 영국 및 미국 공사관이 개입함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평양은 청일 양국 군대의 혈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홀은 김창식에게 평양 일을 맡기고 서울로 피하였다가 10월에 마펫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하여 밀려드는 부상자와 환자를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로가 겹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아내의 극진한 치료와 간호를 받았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한한 지는 4년 만이요,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내와 어린 아들, 딸(유복자)을 남기고 떠남으로 한국 감리교회에서의 첫 순직자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고 1894년 11월 27일 배재학당에서 노블 선교사의 주례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아내 로제타 홀(R.S. Hall)은 잠시 귀국했다가 1897년 다시 한국에 나와 평생을 서울과 평양에서 의료선교에 힘썼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맹인학교를 설립하여 맹인교육에 힘썼다. 또한 서울에서 여자의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의학교육에도 헌신하였다. 그의 아들 셔우드(S. Hall)는 의료선교사로 1926년 내한하여 해주 구세병원장으로 부임하였고, 결핵퇴치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유복자로 태어난 딸(Edith Margaret)은 1898년 일찍 죽었다. 1897년 1월에는 그의 유업을 기리는 홀기념병원(또는 紀忽病院, 후에 평양연합기독병원이 됨)이 평양에 건립되었다.

-참고문헌:The Life of William James Hall, M.D.-Medical Missionary to the Slums of New York, Pioneer Missionary to Pyong Yang, Korea, 1897(노병선 역, 《賀樂醫員史蹟》, 1897;현종서 역,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 도서출판 에이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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