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홀(Sherwood Hall, 1893. 11. 10~1991. 4. 5)
서울에서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J. Hall)과 어머니 로제타 홀(R.S. Hall)의 장남으로 태어남. 아버지가 평양 개척 선교사로 활약하다 1894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897년 어머니를 따라 다시 한국에 와서 서울과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난 두 번째 서양아기다. 첫 번째는 그보다 8년 먼저 태어난 아펜젤러의 딸이다. 그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인 1894년 5월 서울을 떠나 부모의 품에 안기어 인천에서 배를 타고 풍랑을 헤치며 황해도 연안을 돌아 진남포항을 거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5월 8일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에서 처음 보는 서양아기로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평양 주민들이 아기를 보려고 몰려들자, 홀 부부는 할 수 없이 이튿날부터 10명씩 조를 짜 5분씩 방안에 불러들여 아기를 구경시켜 주어야 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앞의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와서 문이 부서지고 집안과 마당에 사람이 가득하였다. 할 수 없이 아기를 안고 마당에 나가 앉아서 구경하게 하였는데 1천 5백여 명이 구경하였다. 그는 평양의 조선 아이들 사이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병원에서 일하였으므로 형제도 없이 외롭게 자랐으며 그의 놀이 상대는 거의가 조선아이들이었다. 이들에게서 조선놀이를 배웠고, 거의 그들처럼 행동했으며, 사고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13세 되던 1906년 8월 원산의 캐나다 의료선교사인 하디(R.A. Hardie)를 초청하여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예배하던 중에 큰 감동을 받았다. \"나도 저분처럼, 아니 우리 부모님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리라.\" 하디의 설교는 어린 셔우드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1900년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1908년까지 수학하였다.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허몬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같은 해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운트유니온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셔우드는 서울과 평양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이 결핵으로 젊은이와 어린이들까지 죽는 것을 보았고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캐나다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흉부질환과 폐결핵을 전공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 1년 전 같은 의과대학 출신의 산부인과 전공 여의사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1922년 6월 21일(아내의 생일) 결혼하였으며 신혼여행으로 대서양을 건너 스위스 로잔에 있는 폐결핵의 수술과 치료시설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롤리어병원(The Rollier Medical Center)을 둘러보았다.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 의료선교협회 추천으로 스텟슨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1926년 4월 19일 한국에 왔으며 곧 해주 구세병원(일명 노튼기념병원)에 부임하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당시 해주는 장로교, 감리교 합의에 의해 감리교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해주 남학교인 의창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이 엄청난 책임 앞에 셔우드는 깊은 고독감과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때 마음속 깊은 데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너는 지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주님이 도와주시고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얻었고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러 방면으로 모금운동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결핵요양원 설립을 추진하여 어머니와 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건립하고 헌당식을 김유순 감리사(해주)와 오긍선 박사(세브란스 의전 학감)의 축사로 1928년 10월 27일에 거행하였다. 요양원 구조는 일부 한식으로 지었고 특히 창문을 수정으로 장치하여 자외선을 잘 통과하게 하였고 엑스광선기와 기타 값비싼 기기를 설치하였다. 또 부설 농장이 있어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여 환자들에게 공급하는 한편 농장에서 가축을 길러 병원 운영비에 충당하였다. 또한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를 설립, 결핵퇴치를 위한 제도적인 교육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요양원을 시작한 초기에 환자들을 이해시키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결핵은 계속적으로 요양과 치료를 받아야 병이 치유된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과 독지가들의 경제적 지원 기간 만기가 심각한 것이었다. 미선교부에서는 경제적으로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본국에서 다른 후원자를 찾아야 할 입장이었다. 1930년 6월 27일 그는 아내와 함께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선교부의 소개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실의 창안자 비셀(Emily P. Bissell) 여사를 만나 크리스마스 실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왔으며 총독부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32년 크리스마스 때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하였다. 실의 도안은 조선의 민중들에게 열성과 가능성을 주기 위하여 \"이순신과 거북선\"으로 그릴 계획이었으나 일본 관리의 강한 반대로 서울의 남대문을 도안하여 발행하였다. 처음엔 조선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친구들까지도 강력히 반대했으나 차근차근 설득하여 첫해의 크리스마스 실 운동은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크리스마스 실 10여 종(1933~1940)을 모두 캐나다 스미스소니안박물관(The Smithsonian Museum)에 기증하여 셔우드는 \"크리스마스 실 닥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이러한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봉사 때문이었다. 그는 구세병원, 구세요양원, 결핵위생학교, 해창학교 등 여러 기관의 책임자로 바쁜 나날을 보내며 부모의 뒤를 이은 2대 의료선교사로 특히 한국 결핵의 퇴치와 예방사업에 20여 년 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33년에는 구세요양원 안에 어머니의 업적을 기리는 로제타기념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하였다. 1938년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갔다가 1939년 가을에 돌아왔으나 국내 사정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선교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40년 8월 일본 경찰은 그에게 범죄자란 누명으로 10월 재판에서 3년 징역형 또는 벌금 5천 엔을 선고하였다. 그는 결국 병원 일을 한국인 의사 문창모에게 맡기고 1940년 11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선교본부의 명으로 인도에 부임하여, 파키스탄 접경인 마다(Madar)에 있는 마다 유니온요양원에서 23년간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마스 실을 시작하였고 결핵퇴치운동을 하였다. 1963년 은퇴한 후 인도 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귀국 길에 한국에 들러 대한결핵협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은퇴 후 캐나다에 머물면서 자선의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1984년 11월 3일 셔우드 홀 내외가 꿈에도 그리던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자 곧 양화진의 부모님 묘소를 참배하고, 기자회견ㆍ환영리셉션, 11월 7일 보사부장관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11월 10일 출생지인 서울에서 91회 생일잔치를 대한결핵협회 주최와 많은 친지들의 도움으로 성대하게 치렀고 11월 11일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귀국하였다. 1991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그가 1978년 쓴 회고록 With Stethoscope in Asia: Korea(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는 홀의 가문과 한국 선교 업적 및 일제시대 의료선교와 교회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논문:\"A Round Robin Letter……\"(편지), The Korea Mission Field, 1914. 12;\"Application of Sanatorium Methods for Korean Patients,\" China Medical Journal, 1930. 7;\"The Story of Korea\'s First Christmas Seals,\" The Korea Mission Field,, 1933. 5;\"Pioneer Medical Missionary Work in Korea,\" Within the Gate, 1934;\"The Call for Medical Pioneer in Rural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36. 12;\"Medical Mission Work in Haiju,\" The Korea Mission Field, 1937. 5;\"The 1939 Christmas Seal Campaign,\" The Korea Mission Field,, 1939. 11;\"The Progress of Missionary Anti-Tuberculosis Work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40. 10.
\"보고서:\"해주구세병원보고\", 〈연회록〉, 1928~1937;\"의정보통학교상황보고\", 〈연회록〉, 1937.
-저서:With Stethoscope in Asia:Korea, MCL Associates, 1978(김동열 역,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동아일보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