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현석칠(玄錫七, 1880~?)


독립운동가

일찍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0년부터 미감리회 전도사로 해주읍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1911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제1회), 그 해 서울 동대문교회로 전임되었고 1912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아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1914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7년부터는 공주읍교회를 담임하는 한편 1918년 조선예수교감-장연합공의회에 미감리회 대표로 참석하였고 1919년에는 서기로 봉직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24일 공주 영명학교 교사 김관희ㆍ이규상ㆍ현언동, 졸업생 김사현, 학생 오익표ㆍ안성호 등과 공주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한편 공주만세운동을 김관희에게 맡기고 자신은 서울로 올라와 3.1운동 이후의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한성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기독교 측 대표로 이 일을 위해 4월 19일 6백 원을 내놓았고, 민강 등과 함께 국민대회 때 쓸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을 비롯한 취지문ㆍ결의문ㆍ약법 등을 인쇄하였고 마침내 4월 23일 서울 시내 각처에서 만세시위와 함께 임시정부 선포식을 가졌다. 그가 체포된 날짜와 장소는 명확치 않으나 공주 만세시위와 관련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석방 후 평양 남산현교회로 옮겼으며 1920년에는 강서(江西)읍교회로 전임되었다. 여기에서 5년간 봉직하고 1926년 영변읍교회에 부임하였으며 1929년에는 영변지방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 평양 신양리(新陽里)교회로 옮겼고, 1931년 신창(新倉)교회를 담임하면서 신창(新倉)지방 감리사가 되었고, 1933년 12월 18일 교역 25주년 기념식을 유정(柳町)교회에서 열었다. 1935년 자원 퇴회한 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내다가 1939년 다시 만주선교연회에 입회하여 북만주 사평가교회를 담임하였다. 귀국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별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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