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현동완(玄東完, 1899. 6. 12~1963. 10. 25)


청년운동가. 호는 창주(滄柱). 필명은 귀원(歸園)

서울 마포구 현석동에서 태어났다. 1916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서울중앙YMCA 간사로 취임하면서 이후 별세하기까지 평생을 YMCA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신흥우가 윤치호의 뒤를 이어 YMCA연합회와 서울YMCA의 겸임 총무로 취임하자, 인재양성의 필요를 통감하여 1921년 구자옥을 시카고YMCA전문학교에서 2년간 수학케 하고 1922년 귀국과 동시에 서울YMCA의 부총무로 기용하는 한편, 즉시 현동완을 선발하여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YMCA에 수습간사로 파송하였다. 당시 클리블랜드청년회는 무디 이후의 YMCA 세계에 있어서 전도운동의 선봉이었다. 아마도 신흥우는 클리블랜드청년회야말로 현동완의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클리블랜드청년회에서의 수습시기를 포함한 4년간의 미국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 시절 퀘이커교도들과 깊이 사귀었고 또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벽지의 수도원을 방문하는 생활을 보냈는데, 수도원 중에서도 퇴락한 일인승(一人僧) 수도원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복음의 사회화운동\"이 한참 격렬해져 가던 무렵인 1926년 귀국한 그는 이와 대조되는 경건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으니, 곧 YMCA 소년들로 구성된 \"평화구락부\" 클럽을 창설한 것이다. 매주 금요일에 정기집회를 갖고 평화의 이름 아래 개인적 수양과 사회봉사의 훈련을 받도록 했는데, 수련내용은 금요기도회, 등산, 도보여행, 근로봉사, 구제활동 등이었다. 매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을 기념일로 삼고 평화기념식을 열었으며, 연말에는 \"동지야, 빈민을 위하야 3일간 노상에서 걸인이 되자\"는 격문을 내걸고 메달(1개 5전)을 팔아 그 수입으로 구제활동을 폈는데, 1930년 보고에 의하면 8백여 원을 모아 서울 인근 극빈자 4백여 호를 방문하였다. 1930년 그가 구자옥의 후임으로 중앙기독교청년회의 부총무가 된 이후, 이 평화주의적 사회봉사활동은 \"참\"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 연령층을 망라한 서울YMCA의 가장 역점적인 종합적 프로그램이 되어갔다. 그의 간청으로 시작된 유영모(柳永模)의 \"금요강화\"는 이 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했으며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의 \"동정메달\" 구제활동은 지방으로 확대되면서 \"참\" 운동이 점차 조선기독교청년회의 또 다른 지도노선을 형성해 갔다.

한편 처음에는 청년회의 사회복음주의 노선과 경건주의 노선 사이에 제휴가 모색되기도 했으나, 점점 두 진영간에 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건주의는 복음의 사회화를 위한 실천력을 제공할 수도 있었으나, 사회복음주의 진영은 경건주의의 역사참여의 지체를 비난했고, 경건주의 진영은 진실된 삶이 결재(缺在)된 사회개혁의 허구성을 지탄하였던 것이다. 1932년 신흥우는 \"적극신앙단\"운동을 전개하여 기독교의 민중화 등을 내세웠으나 밖으로는 교계 보수세력과 안으로는 경건주의 노선의 저항 등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결국 1935년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한국YMCA는 일제의 직ㆍ간접적인 탄압ㆍ분열ㆍ운동방향에 대한 불안감ㆍ재정압박 등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고, 이에 윤치호는 그 자신이 연합회의 총무를 대행하는 한편 현동완을 연합회 순회간사(실질적 총무), 구자옥을 서울YMCA 총무로 임명하여 새로운 지도체제를 수립하였다. 현동완은 청년회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5년 5월에 연합회 순회간사로 임명된 직후 원산\"함흥 등 각 지방을 출장하여 지방지도자들과 수습책을 협의하였으며 이듬해 1월 기독교청년회 대표위원수양회를 열어,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회원의 종교적 수련과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와 불우한 이를 위한 봉사활동에 역점을 두는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후 그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참\" 운동을 전개하였고 클럽활동 위주의 소년사업을 장려하여 봉사와 구제사업을 폈으며, 삼동회(三同會) 등 구제사업을 운동화했다. 그러나 사회적 비전을 결여한 수도지향적 경건주의만으로는 청년회의 침체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내 청년회 지도층의 비평적 저항에 부딪혔다. 또한 극도의 불안을 자아내던 정치ㆍ경제적 상황 속에서 일반사회의 호응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937년 7월 연합회 순회간사직을 사임하였고, 이후 함북지방에 은둔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 교통부장 고문이 되어 일했던 그는 1948년 6월 서울YMCA 총무로 취임, 각 부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갔으며 특히 종교부와 소년부 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종교부는 \"복음운동의 대중화\"라는 기치 아래 매주 일요일 3회의 신앙집회(유영모ㆍ한에녹ㆍ함석헌)를 열어 많은 청중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었고, 소년부는 신앙운동ㆍ보이스카웃운동ㆍ소년평화운동ㆍ삼각소년회ㆍ어린이합창단 등을 조직, 운영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한국YMCA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가운데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연합회 위원들과 함께 YMCA 복구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1952년 서울로 복귀하여 이후 부랑ㆍ범죄 소년을 위한 삼동소년촌, 윤락여성 선도를 위한 삼동부녀회관, 무산아동을 위한 무료중학교 등 복지사업을 서울YMCA의 주축 프로그램으로 시행하였다. 그러나 1955년경의 서울YMCA 회원과 이사 모두의 관심은 회관 재건에 쏠려 있었고, 때문에 그의 실천적 경건주의에 불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회관 재건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국내외 및 주한미군 등에 회관 재건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모든 노력이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실의와 피곤에 지친 그는 손수 두계(豆溪)에 수도를 위하여 마련한 오두막에 퇴거하여 휴양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결국 1957년 3월 총무직을 사임하였다.

1959년 12월 병으로 누운 그는 난지도 삼동소년촌 단칸방에서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 그가 명예회원으로 추대되는 서울YMCA 60주년 기념식(1963. 10. 28)을 사흘 앞두고 별세하였다.

황광은(黃光恩) 목사는 그를 \"20세기 종로의 성자\"라고 하였으며, \"분명 그는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것도 천당 속에 높이 앉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주님께 미친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는 YMCA라는 봉사단체에서 시작되어 병으로 눕기 수개월 전까지 40년 간을 청소년지도에 그 몸을 바친 것이다\"라고 추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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