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93. 1. 26~1949. 8. 5)


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홀법(訖法) 또는 할보(轄甫)

미국 버몬트 주에서 회중교회 목사이자 미들버리(Middlebury)대학 학장이던 헐버트의 차남으로 출생. 헐버트의 모친은 다트머스대학 창설자의 후예로 그녀의 부친은 인도 선교사였다. 다트머스대학을 거쳐 1884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국립으로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그 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하였는데 당시 국무성 교육국장 이튼(J. Eaton)이 다트머스대학 동창인 헐버트의 부친에게 유니온신학교에 재학중인 두 아들 중 하나를 교사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문의하여 이에 형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그가 교사로 선발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초빙교사 벙커(D.A. Bunker), 길모어(G.W. Gilmore)와 함께 1886년 7월 4일 한국에 파송받게 된다.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에서 그가 한 첫 사업은 \"육영공원 설학절목\"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는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에 대한 규정으로 신식학제를 갖춘 비교적 손색없는 규칙이었다. 그를 비롯한 교사들은 영어, 역사, 자연과학, 지리, 수학 등 근대적인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학생들도 현직 관리와 재능 있는 선비들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호응이 높았다. 특히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헐버트는 1891년 간이 천문 지리서의 성격을 갖춘 《민필지》(士民必知)를 순 한글판으로 냈다. 이것은 1892년 이후 기독교 계통 학교는 물론 일반 학교에서도 필수적인 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헐버트는 1891년 12월 육영공원 축소책에 따른 급료 지급문제 등으로 일단 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1893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미감리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이미 육영공원 교사 시절부터 기독교선교를 측면 지원하였고 성경과 종교서적 번역사업에도 참여한 바 있던 그는 정식 선교사로 내한한 후 미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를 주관하였다. 그가 삼문출판사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전도지와 종교서적 1백만여 면을 인쇄 반포하였으며 운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까지 끌어 올렸다. 그는 또 삼문출판사에서 1892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The Korean Repository란 영문 한국학 연구지 인쇄와 운영도 맡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역사, 풍속, 언어 등에 관한 자신의 연구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구체적 정치 참여는 1895년 11월 28일 국왕탈권미수사건인 춘생문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 명성황후시해사건(1894)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외국 선교사들을 항상 주변에 둠으로써 보호받으려 했다. 이때 헐버트를 비롯하여 존스(G.H. Jones), 게일(J.S. Gale), 언더우드(H.G. Underwood), 애비슨(O.R. Avison) 등이 교대로 고종을 호위하였는데 이 같은 분위기에서 친미, 친러파가 주도하여 국왕을 궁궐 밖으로 모시려 했던 춘생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한국의 정치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헐버트는 상류층 청년지사들을 당시 교회가 수렴할 수 없었음을 주시하여 이들 유능한 청년들에게 근대적인 사회개혁의식을 고취시키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에 접근시키는 방안을 모색하여 착안해낸 것이 곧 YMCA운동이었다. 즉 YMCA를 한국에도 설치, 이를 통해 청년들의 의식을 개조하고 이들을 미래의 지도자로 양성하려 하였다. 이같이 YMCA운동을 사회운동의 성격을 띤 청년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던 그의 입장은 이 운동을 순수 신앙운동으로 만들려는 언더우드의 입장과 거리가 있어 초창기 YMCA운동에 혼돈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한국의 YMCA운동은 헐버트의 입장대로 방향을 잡게 되었고 창설의 주동적인 역할을 그가 감당하였으며 1903년 한국YMCA(황성기독청년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1905년에 접어들어 가츠라테프트 밀약(1905. 7), 영일동맹 체결(1905. 8), 포츠머드 조약 등으로 일본의 한국병합이 구체화되자 한국 정부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러한 일본의 획책에서 벗어나고자 미국 정부에 밀사를 파송키로 하였는데 헐버트가 그 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5년 10월 중순경 비밀리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고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미국이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고종의 친서를 받아 워싱턴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그가 워싱턴에 도착하는 날(11. 27) 국내에서는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미국은 가츠라테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던 터라 수차에 걸쳐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헐버트의 시도를 묵살하였다. 워싱턴밀사활동에 실패한 그는 1906년 6월 다시 내한하였고 오던 도중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이를 고종과 YMCA 회원들에게 전해 주었다. 이후 그는 헤이그밀사사건에도 관련되어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헤이그에 파송된 이준 등 세 밀사보다 먼저 헤이그에 가서(1907. 4) 이들 세 밀사들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태도에 대하여 선교사들간에 말이 많았으며 특히 일제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1905년 5월 8일 본국의 소환형식으로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한국을 떠난 후 그는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YMCA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후에는 은퇴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머물러 있다가 194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해방된 한국을 방문하였으나, 여독으로 서울 위생병원에 입원하여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그의 소원대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뛰어난 업적은 무엇보다 그의 폭넓고 깊이 있는 한국학 연구라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한국의 언어, 풍습, 종교, 유물, 유적을 섭렵하여 문화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밝히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을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두 계통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기자조선 성립 시에 그 세력이 남쪽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남해안에는 타동족이 존재했다는 것과 삼한의 도시명이 남방언어의 특징인 다음절(多音節, poly-syllable)이라는 점, 그리고 문신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 건국을 전제하고 있는 점이나 인도 드라비다 족 유입설 등은 지나친 비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착상과 주장이 정당한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는 데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헐버트 자신이 한국민을 접촉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먼저 합리적이고 신비적인 기질이 적합하여 유교나 불교보다 기독교가 능동적으로 수용된다는 기독교의 주관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참을성이 강한 황소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편 당시 사회상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 즉 진실성과 정의감의 결핍, 공공의식 및 위생관념의 부족 등을 들기도 한다. 헐버트는 한국사를 주변국가와 구별되고 독립된 개성이 뚜렷한 역사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생각했던 게일 등과는 의견을 달리했다. 그러나 역사 발전단계가 다른 서양에 맞춰 한국의 시대구분을 설정하였고 왕조와 정치사 중심의 서술로 인해 사회, 경제, 문화를 소홀히 다루는 등 서술 방법에는 문제점을 품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양인으로서 한국의 역사를 깊이 연구한 것과 19세기 이후의 부분은 사료로서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저서:《민필지》, 1891;The History of Korea, 1905;The Passing of Korea, 1906;《대한력사》,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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