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한기모(韓琦模, 1893. 11. 3~1978. 9. 20)
평안북도 영변에서 그 지역 서당의 훈장이었던 한석홍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열일곱 되던 해에 결혼하였으나, 일년이 못되어 사별하고, 생을 비관하며 지내던 중, 그 지역에 감리교 선교사가 와서 전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숭실학교에 다니게 된다. 1916년 숭실학교를 마친 후에는 밀러라고 하는 의료선교사 밑에서 일하면서 공부하는 중에 목사가 되기 위해 협성신학교에 진학한 것이 평생 목회자로 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료 중에는 의사가 되겠다고 해서 후원받아 의사가 된 세브란스병원 원장 김명선 박사도 있었다. 또 감리교 류형기 감독도 그와는 서당에서부터 알게 된 동료였다. 당시에는 목회자가 많지 않아서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전도사 일을 맡아 했는데, 처음 부임한 교회가 1919년 4월 15일 동네 청년들을 다 교회당에 모아놓고 불질러 죽인 제암리교회였다. 그 해 4월에 부임하고 보니 예수 믿어 결국 아버지 죽고, 남편 죽고, 아들 죽는다면 그런 교회는 다니지 않겠다며, 사람들이 배척하고, 또한 일제 치하가 무서워 오직 전동례라는 과부 속장과 아무 가족이 없는 처녀 한 명, 이렇게 둘만 있는 교회였다.
그는 그 후 1920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여, 공주 등 중부지역에서 목회하다가 일제 치하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이주하는 동포들을 위한 교역길에 오르게 된다. 만주의 장춘, 길림, 하얼빈 등지에서 목회를 하다가 만주사변 직전에 고국으로 오게 되는데, 당시 아무도 안 가는 강원도 목회를 자원하여, 강원도 목회가 시작되었다. 그가 양양교회에서 강릉교회로 파송되어 갔을 때 강릉에서 토박이 신자들의 교회 분립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 당시 전승훈, 박병수 두 전도사를 중심으로 소위 재강(在江)파가 교회를 분리코자 했으며 이것이 총리원에까지 알려져서 양주삼 총리사 대리가 구성서 목사를 보내고 구성서 목사는 강릉으로 내려가 강릉교회 정식 당회를 열고 결국 교회 분리를 결의하였고 강릉교회는 금정교회, 분리된 교회는 대화정교회로 명명했다. 1937년 지방회의 권고로 한기모 목사와 전승훈 전도사가 화합하기로 합의를 하고 당시의 분규를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와중에 한 목사의 부인이 6남매를 두고 별세하였다.
당시 강원도의 상황은 목회자가 많지 않아 어떤 때는 일곱 교회까지 돌보는 순회 목사로 강릉, 삼척, 양양, 도계, 묵호, 장성, 죽변 등지에서 목회하던 중에 6.25전쟁을 만나, 죽변 부두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피난하게 된다
이때 가족들은 제주도에 머물렀고, 한기모 목사는 천안제일교회에 시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계가 호헌파로 어지럽던 1955년 삼청교회에 부임하면서 서울 목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천안제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때 1954년 류형기 감독을 반대하는 \"호헌파\"에 가담하였고 그는 1955년 3월에 그가 담임하고 있던 천안제일교회에서 총회와 연회가 열렸다. 그만큼 그는 \"호헌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1956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총리원\" 측 중부연회에 참석하여 삼청교회로 다시 파송받았다. \"호헌파\"에서 \"총리원\" 측으로 옮긴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삼청교회 교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 결국 한기모 목사를 반대하는 교인들이 1956년 여름부터 경무대(지금 청와대) 입구, 언덕 공터에 천막을 치고 따라 나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정식으로 간판을 걸지는 않았지만 천막 친 위치가 옛날 춘생문(春生門)이 있던 곳이라 해서 \"춘생문교회\"라 불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삼청교회가 화재로 전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당시 서울북지방 감리사 김광우 목사의 주선으로 교체하여 1958년 삼선교회에 부임하였고, 3년을 지나면서, 70세 은퇴 때까지는 너무 오래다 싶어 부임지를 찾던 중에 청량리교회 이병남 목사가 비슷한 처지여서 서로 목회지를 교환하는 차원에서 청량리교회에 부임하게 되었다. 한기모 목사는 청량리교회에 1961년 4월 5일 부임하여, 1964년 3월까지 시무하고, 정년은퇴하였다.
한기모 목사의 호는 천우(天牛)였고, 인내, 온유, 참을성이 많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목회는 한마디로 인내와 끈기의 목회였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소(牛)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어릴 적 예수 믿기 전에 소를 먹이며 꼴을 베면서 가사를 도왔는데, 그때 생각에 소를 보니 살아서는 열심히 주인 위하여 일하다가 죽어서도 고기는 고기대로, 뼈는 곰국으로, 가죽은 구두로, 뿔로는 빗 만들고, 변까지도 거름으로 쓰면서 하나 버리지 않고 사람에게 충성 봉사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소인 목사가 되어서 소만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지론이었다.
후에 은퇴 기념 선물로 쌀 한 가마니를 받았으나, 갈 곳이 마련되지 않아 친구인 윤성렬 목사의 주선으로 역촌동에 있는 은평수양관 관리 일을 하면서 서부병원, 서부경찰서 유치장 전도, 갱생원, 실로암 결핵환자 요양소 등지를 순회하였고, 그 중에 중환자 결핵요양소 지역에 실로암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 후 1978년 9월 20일 지병으로 86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한기모 목사는 평소에 친구인 세브란스병원 원장인 김명선 박사에게 \"내가 죽거든 시신을 땅에 묻지 말고 의학교재로 사용하도록 세브란스 의과대학에 바친다\"는 서명에 날인하고, 소천 후에는 약속대로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여 현재 유골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 실습실에 표본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