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김란사(金蘭史, 1872.9.1~1919.3.10.)-하란사
하란사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정 배경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인천 별감(別監)으로 있던 하상기(河相驥)란 정부 관리의 후처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보아 상류 양반 계층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남편 직장이 인천 항구였던 관계로 그녀는 개화된 서구문명을 접할 수 있었고, 여성을 위한 신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녀가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 것은 1896년 무렵이었는데, 처음에는 그녀가 기혼자란 이유로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당시 이화학당 교사로 있던 프라이(L.E. Frey)를 밤중에 찾아가 갖고 갔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는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줄 수 없겠느냐?"라고 애원함으로 입학을 허락받았다.
그녀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인 것으로 추측된다. 세례를 받고 이름을 "란사"(蘭史)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영어 이름 "낸시"(Nansy)의 한자음역이다. 그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 이때부터 "하란사"로 불리게 되었다.
1900년에는 일본 유학(게이오대)의 길에 올라 1년 동안 수학한 후 귀국하였다가, 다시 1902년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여 1906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는데, 한국 여성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귀국 후 스크랜턴(M.F. Scranton) 대부인이 세운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는 정규 학교라기보다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한 학교였다. 기혼여성으로 신학문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여 일본ㆍ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하란사로서는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스크랜턴을 도와 영어ㆍ성경 등을 가르치며 불운한 환경의 여인들을 깨우쳐 나가기 시작했다.
1908년 앨벗슨(M.M. Albertson)이 이 학교 교사로 들어오면서 스크랜턴은 앨벗슨에게 책임을 맡기게 되었고, 앨벗슨은 하란사와 함께 이 학교를 단순한 영어학교가 아니라 성경학교로 전환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하란사는 미국 유학 후 돌아온 처음 4년 동안 이 학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학교는 후에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가 되었다가 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초창기 한국 감리교의 여성지도자인 양우로더(梁雨露德), 신알베르트, 손메리 등이 모두 하란사에게서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 또한 그들은 단순히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의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거리와 시골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가였다.
1910년 9월 이화학당 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자 그녀는 이 대학과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오늘의 교감에 비유할 수 있는 총교사(總敎師)가 되었고, 이화학당 기숙사도 책임을 맡았다. 1911년부터는 터틀(O.M. Tuttle)과 함께 이화의 지교(枝校)로 있던 서울의 서대문여학교, 아오개(아현)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용두리)여학교, 한강여학교 등을 지도하는 책임까지 맡았다.
윤치호와 논쟁을 벌인 것도 그 무렵이었다. The Korea Mission Field 7월호에 당대의 거인 윤치호가 "기술교육의 필요성"(A plea for Industrial Training)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1) 신(新)학교 학생들은 요리하는 법을 모른다. 2) 바느질하는 법도 모른다. 3) 옷감을 자르고 빨고 다리미질하는 법도 모른다. 4) 어떤 때엔 시어머니에도 순종치 않는다. 5) 대체로 집안 살림하는 법을 모른다. 6) 전혀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이 하는 그런 힘든 일은 하려고 들지 않는다"라고 한국에서의 여성교육을 비판하였는데, 당대 신여성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하란사는 곧 이 잡지 12월호에 반박문을 기고하였다.
"두 가지 가정 일에 대한 불평이 타당하다고 인정할지라도 다음 사실만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정규 고등학교 졸업생이 그저 요리나 바느질하는 법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그 학교들의 목적과 방향은 슬기로운 어머니, 충실한 아내 및 개화된 가정주부가 될 수 있는 신여성(new type of woman)을 배출하는 것이지 요리사나 간호원, 침모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검정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당당한 신여성' 하란사는, 오랜 관습과 전통을 깨고 여성해방을 몸으로 보여준 개화기의 선각자였다.
1915년 그의 딸 자옥이 이화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는데 갑자기 죽었다. 그러나 딸을 잃은 슬픔을 안고 이듬해 한국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로 미국 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하였다. 또한 신흥우와 함께 뉴욕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며 그 슬픔을 대신하였다.
하란사는 1908년 박에스더ㆍ윤정원과 함께 경희궁에서 고종의 훈장(은장)을 받은 바 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당시 정동교회 목사로 있던 손정도ㆍ이필주 목사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적인 여성운동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선교사들과의 밀접한 관계, 미국여행을 통한 국제 정세의 인식도 민족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확인시켜 주는 요인이 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권좌에서 쫓겨나 은둔중에 있는 고종(高宗)의 밀지를 받아 의친 왕(義親王)을 1919년 6월에 열릴 파리강화회담에 파송할 비밀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자, 하란사가 대신하여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도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고종이 승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경으로 간 하란사는 북경에 도착한 직후 그곳 교포들이 그녀를 위해 마련한 만찬회에 참석하여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북경의 협화의원(協和醫院) 병실에서 자신의 생애를 마쳤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선교사 베커(A.L. Becker)가 그녀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는 그녀의 죽음 직후에 세간에 일본 스파이로 활약한 배정자(輩貞子)가 미행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과 연관되어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독살일 것이라는 의문을 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