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하디(Robert A. Hardie, 1865. 6. 11~1949. 6. 30)


성령운동가. 한국명 하리영(河鯉泳)

캐나다 온타리오 주 칼레도니아에서 출생한 하디는 고향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교편을 잡다가 1886년에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가 해외 선교사의 꿈을 키운 시기는 의대 2년 시절 \"기독교 외국 선교 학생자원운동\"에 가입하면서였다. 1887년 켈리(Matilda Kelly)와 결혼하였고 1890년 의과대학을 졸업하자 곧 캐나다대학 선교회의 선교사로 임명(독립선교사로 8년간 한국 선교사가 된 것)되었다.

1890년 9월 30일 가족을 모두 데리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에 체류하던 게일과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서울로 올라와 애비슨 의사와 함께 제중원에서 환자를 돌보았고 1891년 4월 14일 다시 부산 선교지로 내려갔다. 1892년 11월 11일 함경남도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 미 감리회 경영의 시약소에서 일하였다. 이듬해 봄 전셋집을 얻어 그 스스로 진료소와 시약소를 운영하던 중 1898년 캐나다대학생선교회와의 계약이 끝나자 5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회에 가입하여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901년 10월 20일에는 원산 및 동해안의 미감리회 선교지역이 남감리회로 양도되면서 하디는 더욱 넓은 선교지역을 맡아 활동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미 1901년 3월 31일 김화 지경터에서 장년 15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였으니 이것이 강원도의 첫 교회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자신의 선교 역량 부족과 영적 능력의 결핍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나는 3년 동안 남감리회가 처음 세워진 지경터에서 애써 일을 하였으나 선교사업에 실패하였다.\"

그 뒤 그는 갈급한 심령으로 1903년 8월 원산에서 감리회 선교사 7명과 함께 모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 화이트(M.C. White) 선교사를 강사로 기도와 성경사경회를 열었다. 이때 하디는 큰 감화와 은혜를 받는 새로운 체험을 하였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의 부끄러움과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과 믿음의 부족함과 모든 죄악을 자복하니 회중도 강한 죄의식과 믿음의 부족함을 비로소 깨닫고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이며 이는 곧 1907년 대부흥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907년 연초부터 시작한 \"평양 대부흥운동\"은 그곳 감-장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면서 비롯되었다. 하디는 자신의 깊은 영적 체험을 간증하고 회개운동을 촉구함으로 한국 교회사의 역사적 전환점을 이룩하게 한 중심인물이 되었다.

한편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던 중 1909년에는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1922년까지 재직하면서 학교의 기틀 확립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6년에 〈신학세계〉를 창간하여 본격적인 신학 전문지로서의 문서선교에 일익을 감당했고 1921~1927년에는 조선예수교서회 총무직을 맡아 활약하였다. 1935년 4월 24일 45년 동안의 한국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미시건 주 랜싱에 거주하며 여생을 보냈다. 1945년에 부인이 먼저 별세하였고 그는 1949년 별세했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11살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마가복음강문데》, 1915;《신약총론》, 1918;《구약총론》, 1921;《다니엘셔 강해》, 1921;《마태복음야고보공과》,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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