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콜리어(Charles T. Collyer)
영국 출생으로 중국 상해에서 대영성서공회 소속선교사로 수년간 활약하였다. 그 기간 중에 미국 버지니아 주 애시랜드 출신의 미국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 소속으로 역시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스미디(L. Smithy)와 결혼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가 되었다.
1896년 가을 미국 남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아 1897년 1월 2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부인과 아들(Chalie)은 그보다 5개월 후에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내한하여 합류하였다.
콜리어는 1896년 8월에 최초의 남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한 리드(C.F. Reid)와 함께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시작했는데, 리드는 서울을 책임지고 콜리어는 개성지방을 책임지게 되어 1897년 11월 개성으로 이주하였다. 개성에서 윤치호와 개성의 토호였던 윤치호의 이모부 이건혁(李建赫)의 도움을 얻어 선교기지를 매입하고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다행히 미감리회에서 한국인 전도인 김흥순(金興順)을 보내주어 그를 비롯한 한국인 권서인들과 함께 전도한 결과 1년 사이에 9명의 세례지원자를 얻을 수 있었다.
1898년에는 개성 시내에 남부교회와 문산포에 또 다른 교회가 각각 설립되었으며 그 해 미국에서 보내온 1천 8백 달러를 기초로 하여 학교, 병원, 교회를 위한 선교부 건물을 마련했다. 1900년에 개성(송도)구역회가 조직되면서 그 구역장이 되어 개성뿐 아니라 강원도지역까지 선교활동을 확장시켰다. 1900년에 이미 그의 관할하에 10개 이상의 교회가 설립되어 있었고 그는 이들 교회를 순회하면서 계속적인 발전을 꾀하였다.
1906년부터 춘천으로 옮겨 춘천구역을 담임하였고 1908년 서울 광희문교회를 담임하면서 지경터구역을 관장하였으며 1909년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 송도동구역을 담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2월 평양외국인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평양에 머물러 있던 부인이 병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콜리어는 이듬해 개성에서 활약하던 캐롤(A. Carroll)과 재혼하였다. 이후 계속 개성에 머물면서 활동하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선교부는 연합군을 지원할 선교사로 그를 선발하였고, 이에 1919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그곳 YMCA에서 운영하는 군인 휴양소에서 봉사하였다.
종전 후 그는 본국에 돌아갔다가 한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로 가서 그곳에서 성서반포사업에 종사하다가 1921년에 미국 볼티모어연회로 옮겨 목회를 하였다. 1934년 버지니아 주 쇼빌에서 목회하였다.
-저서:《영아부》, 조선예수교서회, 1918;\"The Culture and Preparation of Ginseng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 3,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