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최인규(崔仁圭, 1881. 11. 15∼1942. 12. 16)


순교자. 호는 천곡(泉谷)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송정리에서 최돈일(崔燉一)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후 한학을 수업하였고, 18세에 부모의 주선으로 한 살 위인 홍은선(洪殷先)과 결혼하여 7년 만인 1905년 첫 딸을 낳았으나 그 후 더 자녀를 얻지 못해 두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부인이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술로 세월을 보냈고 1921년 주위 사람의 인도로 잠시 북평교회(현 북평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기도 했으나 이내 세상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는 45세 되던 1924년 여름 다시 교회에 출석하여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북평교회 담임인 김기정 목사에게서 성경과 신앙생활에 대한 지도를 받는 한편, 상동청년학원에서 발행한 월간잡지 〈가뎡잡지〉를 소개받아 읽었는데 그 중 \"술의 해됨\"(전덕기)이라는 글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25년 2월 15일 학습을 받았고 그 해 12월 7일 세례를 받고 입교인이 되었다. 그는 주일을 엄격히 성수하였고 매일 아침 혼자 앉아 가정예배를 드리며 사람을 찾아 전도하기를 기뻐하였다. 속장과 주일학교 교사로 충성하던 그는 교회의 중요한 일꾼으로 부각되어 유사직과 주일학교 교장 일도 맡았으며, 예수 믿은 지 8년 만인 1932년 9월 16일 삼척구역회 천거로 권사직까지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권사는 본처사역자로서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교회를 맡아 이끌던 중요한 직책이었다.

한편 그가 권사 직첩을 받던 날 권화선(權化善)도 속장에 임명되었다. 그녀는 경북 춘양 태생으로 26세에 삼척군 북삼면 천곡리 샘실마을에 사는 홍운천에게 재가해 와 냉천마을에서 술장사를 하다가, 왕복 40리가 넘는 북평교회를 열심으로 다니던 며느리 김태봉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녀의 신앙은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이웃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으나 교회가 멀어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중, 김원대(金源大)의 사랑방을 빌려 기도처로 정하고 주일 오전이면 북평교회로 나가고 주일 저녁과 수요일 저녁에는 이곳에 모여 예배드렸다. 1931년 여름 한 마을에 사는 이창석의 아내가 이상한 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보고 교인들과 함께 3일간 예배를 드렸더니 완쾌되어 이후 교인이 됨은 물론이고 이창석의 부친이 교회터로 텃밭 68평을 헌납하기까지 했다. 이에 권화선은 목수인 오석만 가족과 그 외 교인들과 협력하여 1932년 방 2칸, 부엌 1칸, 그리고 예배실 15평의 천곡교회를 지었다. 이후 믿음의 식구는 늘어갔지만 말씀을 전할 설교자가 없어 안타까워하던 그녀는 최인규에게 이 일을 부탁했고, 그는 이를 쾌히 승낙했다. 이후 최인규 권사는 자신의 논 5백 39평과 밭 1천 3백 69평을 교회대지로 헌납하였고, 밤에는 새끼를 꼬고 낮에는 재목을 운반하며 열심으로 일하여 1932년이 채 가기도 전에 초가 8칸 예배당을 세웠으며 이듬해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최인규의 헌신적인 신앙과 생활은 전 감리교회의 모범이 되어, 1938년 10월 총회 때 상장과 은제 상패를 표창받기도 하였다.

1938년 이후 더욱 가중되는 일제의 탄압 속에 교회가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근심하던 그는 결국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1940년 5월 체포되었다. 삼척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그는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못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된 의무로서 국가적인 의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뿐\"이라는 회유와 함께 잔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으나, \"나로서는 당신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다. 신사(神社)는 일본 민족의 종교다. 신사참배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 앞에 굴복하는 것이지 그것이 단순한 국가행사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일경은 망신을 주기 위해 그의 어깨에 똥통을 지우고 동네 집집마다 끌고 다니며 \"내가 예수 믿는 최인규입니다\" 하고 외치게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기쁘게 끌려 다녔다.

당시 삼척교회 권사로 울진교회를 맡아 전도사 일을 하던 친구 차국성 권사가 삼척경찰서장과 안면이 있는 고로 그를 찾아가,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였는데 예수를 믿고 차도가 좋았다. 지금 아마 그것이 재발된 것 같으니 가급적 석방시켜 주길 바란다\"고 간청했다. 이에 경찰서장은 \"당신이 정신병자야. 예수를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 하고 호통을 쳐 보내기도 하였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던 서장도 그의 신앙에 내심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강릉구치소로 옮겨져 고문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함흥재판소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요, 다른 신은 경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천조대신과 천황도 하나님이 내신 사람이다. …… 그러므로 신사참배는 절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기독교를 없애려고 애쓰던 옛날의 바빌론과 로마는 망하였다. 너희 일본도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지 않으면 ……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재판장은 격노하여 책상을 치며 불경죄로 징역 2년형을 언도했다. 그때가 1941년 11월 21일이었다.

감옥에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늘 찬송을 부르며 전도하였다. 그는 조용히 머리 숙인 채 묵상에 잠겨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가도 간수가 궁성요배를 시키면 허리를 쭉 폈다. 그러면 간수는 욕을 하며 두들겨 팼고, 그는 \"신사참배를 안 하기 위해 감옥에 왔는데 왜 때리느냐. 나는 재판장 앞에서도 안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의 감방에는 사상불온죄와 불경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원산지방 고성교회 이진구 목사도 있었는데, 최인규가 간수들에게 매맞는 것이 안쓰러워 \"신사참배를 한다 하면 내보내줄 것 같으니 그냥 한다고 하고 나가세요\"라고 권하였다가 크게 책망을 들었다 한다. 이후 1941년 12월 대전형무소로 함께 이감되었다. 주로 사상범들이 수감되던 대전형무소의 교회사(敎誨士, 사상전환을 시키는 사람)는, \"너희 선생인 전도사와 목사들도 신사참배를 하는데 공연히 고집부리지 말고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고 신사참배를 하면 특별히 가출옥시켜 주겠다. 처자들이 보고 싶지 않은가. 불쌍하지 않은가\"고 회유했으나 그의 신앙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계속되는 고문과 잦은 단식으로 점점 몸이 쇠약해져 음식조차 먹을 수 없게 되자, 병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3일 만인 1942년 12월 16일 14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후 그의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삼척교회로, 거기서 다시 1986년 11월 11일 천곡교회 교정으로 옮겨 안착하였다.

-참고문헌:윤춘병, 《순교 순국자 최인규 권사의 삶과 신앙》,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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