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최성모(崔聖模, 1874∼1937. 3. 14)
1874년 서울 안동에서 출생. 한학에 정진하여 1888년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함으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최성모의 부인 김씨는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자신의 이름을 \"주님을 믿는다\"는 의미의 김주신(金主信)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에 최성모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그 외아들에게 어머니는 어리석은 여자라고 타이르고 기독교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였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어지러운 나라 정세가 계속될 즈음 그는 친구 이필주와 함께 우연히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대강연회 포스터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전덕기 목사 등의 강연을 듣고 큰 감화를 받았으며 비로소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였다. 즉 하나님 사랑과 민족 사랑의 관계를 처음으로 터득했던 것이다. 그는 그 길로 귀가하여 배재학당에 다니던 아들을 불러 가위를 가져오게 하고 직접 소중히 지켜왔던 상투를 잘랐다. 다음날부터 상동교회에 출석했으며 1908년 세례를 받고 감리교회에 입교했다. 그는 전덕기 목사의 지도 아래 신민회 회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YMCA의 간부로도 크게 활동하였다. 그 후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부터 서강교회 전도사로 교역에 나갔다. 당시 최성모 전도사에게 신앙지도를 받았던 최석주는 최성모에 관하여 \"그의 설교는 웅변이 있고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서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감명 깊은 말씀으로 들렸다\"고 하였다. 또한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넣어주었고 또 한편으로 용기를 넣어주어 선생이 서강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나간 사람이 4~5명이나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졸업 후 목사로 임직되는 동시에 연회에서 만주 봉천교회 목사 및 내\"외몽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1917년 해주 남본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흔쾌히 민족 대표로 가담하였고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지휘했다. 재판과정에서도 자신의 투철한 독립의지를 드러내었다. 2년 반의 옥고를 치르고 다시 목회에 나섰으나 일제의 감시로 어려움을 당했다. 서강교회에서 다시 시무하였다.
1922년부터 상동교회에서 2년간 시무했고 이후 만주 목단지방 선교사, 중국 대련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그 후 충남 천안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충남 예산교회에서 시무하다가 병고로 인해 은퇴하고 1933년 이후에는 수원에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1937년 3월 14일 별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으셨고 동작동 국립묘지의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