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최병헌(崔炳憲, 1858. 1. 16∼1927. 5. 13)
\"한국 최초의 신학자\" 혹은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란 칭호를 받는 최병헌은 한국의 전통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교를 해석한 대표적인 학자로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학운동을 주도하여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와 한국 교회 전체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는 충북 제천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꿈꾸었다. 그리하여 남에게 수치를 당하면서도 서당에 가서 \"동냥 공부\"를 하는 등 거의 독학으로 한문에 통달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그 후 친구의 소개로 존스(G.H. Jones) 선교사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이 직업은 그가 생활의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곧 기독교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생활을 보고,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스스로 개종하기로 결심하였다. 존스를 만난 지 5년 만인 1893년 2월 8일 비로소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정동교회에 출석하며 활동하여 초기 감리교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1893년 9월 선교연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았고, 1902년 5월 미감리회에서 집사목사로 1909년에는 장로목사로 안수받았다. 상동교회, 정동교회 등을 담임하며 민중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불어넣어주었다. 1914년부터는 감리사로 피택되어 인천과 서울지방의 교회들을 관리하다가 1922년 은퇴했다.
또 청년들을 중심으로 엡윗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독교 정신을 근거로 한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갈 뿐 아니라 독립협회,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도와 성서 번역 일에 참여하였고, 최초의 신학잡지 〈신학월보〉 창간(1900)에 참여, 신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서강에 의법학교(서강여학교)를 설립하였고 양로원도 설립하여 교육ㆍ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감리교신학대학의 전신인 신학회 4년을 졸업하였고, 남.북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설립한 협성신학교도 1911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는 목회자보다는 신학자로, 종교사상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도 신학 논문들을 계속 발표하였고, 은퇴 후 1923년부터 별세할 때까지 모교인 협성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비교종교학과 한국 문화를 강의하여 한국인 최초의 신학자란 명예에 걸맞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개종의 과정을 학문적 탐구로 발전시키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밝히려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토착 종교에 접근하였고, 진정한 개종은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의 진리는 천상천하에 하나이오 고왕금래에 둘이 없는 것이다\"라는 전제 하에 타종교에 대해 결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태도로 연구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하나로 성취된 바가 그리스도 복음이며 기독교라는 입장을 붙들고 있었다.
그가 〈신학월보〉(1901. 7)에 발표한 \"죄도리\"는 그의 최초의 논문이자 한국인 기독교 신학 논문으로도 최초의 것이다. 그에게 한국인 최초의 신학자란 명예를 안겨준 이 논문은 성경의 내용, 특히 바울서신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기본 교리인 구원의 교리를 해석한 글인데, 자신이 성경과 기독교 문서들을 읽으며 체득한 기독교 신앙 및 신학의 요체를 동양적 시각에서 정리해 내고 있다. 이후 그의 종교 진리 탐구는 \"성산유람기\", \"서교사략\", \"종교변증설\" 등으로 이어졌다.
1907년 〈신학월보〉에 연재했던 \"성산유람기\"는 유ㆍ불ㆍ선 동양의 3종교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분석, 비교한 것으로 비교종교학 논술로는 최초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다른 종교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지극히 기독교 중심적인 결론을 맺고 있지만 타종교에 대해 비판하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연결하는 대화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곧 그는 기독교와 유ㆍ불ㆍ선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간의 협력을 통한 공동체 구성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 논문은 1912년에 \"성산명경\"이란 제목의 책으로 묶여졌다.
그는 또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내던 본격적인 신학잡지 〈신학세계〉에 1916년부터 \"종교변증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동서양의 종교들과 당시 한국에 있던 신흥 종교들까지 포함하여 기본 교리를 분석한 것으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글은 1922년에 \"만종일련\"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비교종교학, 토착화신학에 있어서 최병헌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책은 유교, 불교, 선교 등 동양 종교뿐 아니라 힌두교, 유대교, 이슬람교, 라마교 등의 고등 종교와 당시 한국에 유행하고 있던 백련교, 태극교, 대종교, 천도교, 태을교 등 신흥 종교들까지도 망라해 취급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단순한 종교 해설로 끝내지 않고 각 종교를 하나로 꿰뚫고 있는 맥, 진리를 찾으려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종교를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보려 하였다. 처음 맛은 다르겠으나 씹으면 씹을수록 결국엔 같은 맛을 내는 각종 고깃덩어리들로 종교를 해석하려 하였다. 곧 한 종교를 통해서도 많은 종교들의 가르침과 진리와 통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가 아니라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문화 속에 뿌리를 내린 우리의 종교였던 것이다.
최병헌은 1927년 별세할 때까지 재래 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해명하는 것을 일생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연구활동은 상당한 결실을 이루어 이능화와 함께 한국 종교사학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후 그의 신학은 정경옥,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으로 맥이 이어져 감리교신학대학의 특징적인 신학으로 발전하였다.
-저서:《예수텬쥬량교변론〉(역), 1908;《성산명경》, 동양서원, 1911;《만종일련》, 조선야소교서회, 1922;〈한철집요》, 박문서관, 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