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최나오미(崔耐娛美, 1873. 11. 19∼1949)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 젊은 나이에 개성에 사는 김성률과 결혼하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해 냉대와 질시를 받으며 지냈다. 그 당시, 1897년 5월경 남감리회는 개성에 선교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콜리어(C.T. Collyer)와 한국인 전도인 김흥순(金興順)을 파송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하디(R.A. Hardie) 가족이 개성에 정착하게 되었다. 최나오미는 선교사들을 구경하기 위해 자주 그들을 찾았으며 하디 부인 및 딸들과 친해졌다. 1899년 11월에는 캐롤(A. Carroll)이 개성에 상주하며 한국어를 배우게 되면서 그와도 친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최나오미는 산지현에 있는 콜리어 사택에서 시작된 개성교회(개성북부교회) 예배에도 참석하게 되었으며, 1900년 1월에는 그의 신앙생활을 반대하며 질시를 보냈던 시어머니, 남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오미(Naomi)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최나오미는 1900년 10월부터 전도부인(Bible Woman) 직함을 받아 본격적인 전도에 나서게 되었다. 1901년 하디 가족과 캐롤이 원산으로 간 후 최나오미는 이들에게서 원산으로 오라는 요청을 받고, 남편과 함께 원산으로 갔다. 남편은 선교사 사택 문지기 겸 사무원이 되었고 최나오미는 캐롤과 짝이 되어 전도에 나섰다. 과거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으로서 어려움과 불행을 경험했던 최나오미는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받는 이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인물\"로 그의 위로와 권고는 전도에 많은 열매를 가져왔다.
그는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된 루씨여학교에 보모로 아이들 관리를 맡았고, 1907년 11월 개성에 여자성경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개성으로 돌아와 체계적인 신학수업을 받았고, 1910년 3월에 졸업하고 바로 그 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1년에는 서울에서 협성여자신학교가 새로 시작되었는데, 그 학교 일을 전담하고 있던 앨벗슨(M.M. Alberson)의 요청으로 1년간 협성여자신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이후 1912년 개성으로 돌아와 남성병원 소속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개성남부교회 소속 전도부인이 되었다가 1918년 11월부터 서울 종교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1920년 12월 6일 종교교회에서 서울ㆍ개성ㆍ원산ㆍ춘천 등 남감리교 지역의 여성 대표가 모여 \"남감리교회 조선여선교회\"를 조직하였는데 최나오미는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각 지방 교회의 여선교회 조직을 독려하고 회원들의 회비를 모아 국내외의 선교사업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당시 남성교인들에 의한 해외 선교(일본ㆍ중국ㆍ시베리아ㆍ하와이)는 추진되고 있었으나 여성들의 손으로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한 예는 없었다.
1922년 5월 원산에서 열린 제3차 남감리회 여선교회 대회에서 시베리아 선교가 결의되었는데 회장이었던 최나오미가 시베리아 선교사로 선정되어 그는 해외에 파송된 최초의 한국인 여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1923년 10월, 망명한 한국인들이 집단 한인촌을 이루고 살고 있던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여 시베리아\"북간도지역 한인교회 소속의 전도부인들을 지휘ㆍ관할하는 책임을 맡아 이 지역을 순회하며 돌보는 일을 하였으며 니콜스크에 여자성경학원 예비원을 설립하여 전도부인 양성사업에도 착수하였다. 1923년 10월부터 1924년 9월까지 1년 동안 그는 8개의 여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대부분을 니콜스크ㆍ블라디보스토크ㆍ연추ㆍ북간도지역 순회에 할애하였다. 당시 시베리아는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기독교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가중되던 때임에도 불구하고 최나오미는 여성의 몸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본국의 여선교회가 그를 처음 파송할 때 계획했던 3년이 지났고, 여선교회 경제 형편상 일단 시베리아 선교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1926년 5월 귀국했다. 귀국 후 1927년 개성에 있는 고려여자관 소속 전도사로 지방 선교사업을 주관하였으며, 1933년 12월 개성북부교회에서 그의 회갑을 맞아 \"최나오미 전도사업 33주년 기념식\"을 열고 그의 공을 치하하였다. 이후 일선에서 은퇴한 그는 서울에 살고 있는 양녀 김노득(金路得)의 집에 머물렀으며 1949년 77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