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차경화(車慶嬅, 1911. 3. 9∼ ?)


강원도 춘천 출생. 아버지 차상준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횡성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차경화는 어머니 민숙화와 함께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횡성으로 가서 지냈다. 큰외삼촌이 개화하여 천도교인이었는데 그를 따라 차경화의 가족도 천도교회를 다녔다. 횡성에서 2년간 봉직했던 아버지가 다른 학교로 전근되었고 그로 인해 차경화는 다시 춘천으로 돌아왔다. 여름방학 어느 강습회에 참석했던 아버지가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차경화는 춘천읍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4학년 과정을 마친 후 기독교계 정명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다.

차경화가 학교에 다니던 무렵에는 한 건물을 주중에는 학당으로 주일에는 교회로 사용했는데, 그 교회에 다니면서 천도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정명학교에 편입한 후에는 중앙교회에 출석했고 6학년 말 중앙교회 담임목사인 신석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6학년을 졸업하게 되었을 때 당시 춘천에는 더 이상 공부할 학교가 없었는데 차경화를 비롯한 졸업생들은 졸업장을 반납하면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농성하였다. 한참 공부에 열심을 내려는데 더 이상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이 답답하여 그렇게 하였다 한다. 당시 정명학교의 교장이었던 잭슨의 배려로 상급학교 준비과정으로 1년간 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년이 지난 후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는가 싶었는데 잭슨 교장이 학비를 대준다고 하여 1928년 4월 함경도 원산에 있는 루씨여학교(樓氏女學校, Lucy Cunningham School)에 입학하였다. 졸업생을 위한 부흥회에서 김종우 목사가 집회를 인도했는데 이때 차경화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졸업후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1932년 3월 루씨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6년 3월 24일 졸업식이 있던 날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이호운 목사와 결혼하였다. 졸업식은 오후 2시였고 결혼식은 저녁 7시였다.

1936년 4월 강원도 화천지방으로 파송되어 이호운 목사는 담임으로 차경화는 순회전도사로 일했는데 인근에 있는 아홉 교회를 돌보았다. 1939년 황해도 옹진으로 파송되어 여전도회 회장 및 주교 지도자를 역임했다. 당시 일본의 간섭이 심하였는데 월요일마다 경찰서에 불려가서 주일설교에 대한 트집을 들어야 했다. 더욱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일본 왕의 사진을 교회에 걸라는 압력이 있자 사표를 내고 교회를 떠나 이호운 목사의 동생이 있는 평양으로 옮겨 피복공장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차경화는 배를 타고 인천을 떠나 1951년 1월 2일 제주항에 도착한 후 얼마간 제주에서 지내다가 부산으로 옮겨갔다. 유학중이던 이호운 목사가 1952년 부산으로 귀국하였고 부산으로 옮겨온 감리교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2년 차경화는 박백룡 목사와 함께 부산 부암교회를 개척했다.

서울 수복 후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사택에 살면서 근처에 있던 석교교회에 출석하였고, 석교교회 중ㆍ고등부 부장으로 일하였다. 석교교회 내 샛별유치원을 창원하여 원장을 맡기도 했다.

1956년 이호운 목사가 대전신학교로 옮겨가게 되면서 차경화는 대전YWCA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대전지방 여선교회 총무를 역임했고, 1962년에는 대전YWCA 총무를 맡았다. 1963년에는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대전YWCA 회장을 맡았다. 1965년 YWCA 안에 인혜학원을 만들어 3개월 과정으로 버스 안내양이나 회사 여직공을 훈련시켜 여성 취업에 도움을 주었다.

1970년 서울YWCA 이사를 역임하다가 197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에 한인 노인회가 조직되어 있지 않았는데 최효섭 목사 및 차경화 외 7인을 창립멤버로 하여 상록회를 조직했다. 1976년 뉴욕 상록회 이사, 1984년 남가주 루씨여고 동문회장, 1994년 남가주 상록회 이사를 역임했고, 2000년 월셔연합감리교회 원로장로로 봉직했다.

-저서:《저 먼 하늘에 새벽 별 하나 떠 있네》, 성서연구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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