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주시경(周時經, 1876. 11. 7~1914. 7. 27)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무릉골에서 주학원(周鶴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평생을 글공부에 바친 가난한 선비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888년 서울에서 상업을 하던 큰아버지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가 기독교를 접한 시기는 배재학당에 입학한 1895년이다. 배재는 1890~1891년 무렵부터 학생들의 예배 참석을 의무화했으므로, 그 역시 예배에 참석하며 기독교를 접하였을 것이다. 한편 그는 기독교문서 보급과 학생들의 자립정신을 키우기 위해 배재학당 내에 마련된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에서 시간제 직공으로 일했다. 따라서 1895~1900년 사이 이곳에서 인쇄된 각종 기독교서적 및 교회정기간행물과 신문들은 그의 교열ㆍ수정 작업을 거쳤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기독교신앙에 보다 가까이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재학 시절 배재학당 학생들로 조직된 협성회 회원이었으며, 서재필ㆍ윤치호 등이 주도하던 독립협회 회원 겸 기관지인 〈독립신문〉 회계 겸 교보원으로 활약했다.
1900년 그는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면서 세례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선교사 어학선생으로 생활하면서, 정동 보구여관(1889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전용병원) 안에 설립된 간호원 양성학교 교사 겸 사무원으로 근무하였고, 정동교회에 출석하면서 1902년에는 정동교회 월은청년회 인제국장(구제ㆍ구휼 담당) 임원으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선교사업에 깊이 간여하였다. 이 시기 여성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신앙생활과 배재학당 입학 전부터 가지고 있던 한글의식이 한글운동으로 심화된 것은 1904년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당시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회에는 전덕기를 중심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결집해 있었고, \"경천애인\"(敬天愛人)을 교육이념으로 상동청년학원(설립자 전덕기, 초대 교장 이승만)을 설립했다. 주시경은 이 청년학원에서 설립 당시부터 교사로 봉직하였고, 이후 전덕기 목사와 시작된 교분은 그의 별세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이 무렵 소외계층인 민중과 민족에 대한 관심이 심화되었다. 이 시절 그는 절도 있고 엄격한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그는 말년에 대종교로 개종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김윤경은 그 동기에 대해 기독교를 서양인의 종교로 인식하고 민족 고유 종교인 대종교로 개종했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대해 이덕주는, 주시경이 기독교와 서양 학문을 동시에 접했고 그 자신이 서양 학문의 과학성과 실천적 측면에 영향 받은 바가 컸는데,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일부 선교사들이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1906년경 선교사에 의해 상동청년회가 해산되었으며 또한 기독교인의 민족운동 참여가 쇠퇴하는 상황에 실망하여, 보다 적극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지에서 개종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가 개종한 시기는 민족주의자들이 집단적으로 대종교로 개종했던 1909~1910년 어간으로 추정된다. 한일합병 이후 대종교 지도자들이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을 근거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또한 1914년에 해외 망명을 준비하다 급서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의 망명 계획도 대종교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개종이 과연 내적ㆍ신앙적 차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는 그가 별세할 때까지 상동청년학원, 공옥학교, 배재학교, 이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 학교 교사로 꾸준히 활동하였으며, 그의 장례식 또한 상동교회에서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가뎡잡지〉, 〈신학월보〉 등 기독교 간행물들에 발표된 그의 단편적 글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첫째, 그의 신관은 이지적 유일신관이라 할 수 있다. \"하님\"으로 표기된 그의 신은 기독교 유일신을 의미한 것으로, 특히 그에겐 인간의 모든 지혜(뇌)와 권력(손)의 근원이자 목표로 인식되고 있다. 인식의 근거와 목표로 유일신 하나님을 제시하며 불교ㆍ유교ㆍ무속ㆍ민간신앙의 \"미신적 행위\"를 \"폐습\"으로 거부하였다.
둘째, 그의 인간관은 만민 평등주의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차등이나 구별은 \"뇌\"와 \"손\"의 활용 정도에 의한 것이지, 봉건주의 사회체제가 부여한 신분 계층적 구분에 의한 것은 아니라 하였다. 그가 봉건주의 사회체제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당했던 여성ㆍ어린이에 대해 우호적 관심을 둔 반면, 양반ㆍ선비 계층의 허례와 무위도식하는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한 논리도 여기에 있었다.
셋째, 그는 과학적 실증주의, 실용적 실천주의 생활관을 갖고 있었다. 공리공론에 매인 탁상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제 생활과 연결된 주제들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글 연구는 물론이고 위생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글들이 그의 과학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의 학문은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추구되었다.
넷째, 그는 민족주의 사회관과 국가관을 갖고 있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우리나라"였다. 우리나라 글뿐 아니라 역사와 지리에 대한 관심도 깊었으며 모든 계층, 모든 지역, 모든 성별의 사람들에게 "우리 것"을 가르치려 노력하였다. 그의 일관된 꿈은 우리 민족이 "뇌"와 "손"을 최대한 합당하게 사용하여 세계 인종 중에 뛰어난 인종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지혜"와 "권력"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보다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선구적인 한글운동, 사회개화운동의 밑바탕에는 이 같은 종교신념과 실천 논리가 있었다. 그는 전문 종교인은 아니었으나 한글운동에 쏟은 열정과 정성은 어느 종교인보다 뒤질 것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한글은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였고 그에 대한 응답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서:《국어문법》;《월남망국사》;《한문초습》;《국어문전음학》;《국문초학》;《말의 소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