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존스(George Heber Jones, 1867. 8. 14~1919. 5. 11)
미국 뉴욕 주 모호크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16세 때에 이미 선교적 사명을 자각하고 해외 선교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존스는 고향 우티카(Utica)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가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87년 9월 29일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미감리회에서 임명받은 한국 선교사로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그가 세 번째였다. 존스가 1888년 5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고, 내한 선교사 중에 최연소였다. 존스는 곧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의 학력은 고졸이었지만 그의 대학 수업은 선교 현장 한국에서 독학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어느 선교사보다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 사전을 편찬하였고 한국 역사와 문화, 철학과 종교 분야에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1890년 9월 4일 제물포에 도착하는 여선교사 벵겔(Margaret J. Bengel)을 마중 나간 존스는 그와 연인 사이가 되었고, 1893년 5월 결혼하여 선교사업의 동반자가 되었다. 존스 부인은 특히 영화여학당 설립과 운영에 크게 공헌하였다. 1892년부터 1903년까지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하면서 지경 내 44교회를 관리했다. 당시 제물포지방은 현 인천뿐만 아니라 강화, 황해도 일부, 시흥군 서부 등에 걸친 넓은 구역이었다.
존스의 전도열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강화도 출신인 이승환이란 사람이 제물포에서 예수를 믿게 되어 어머니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 어머니가 세례를 받기 원하자 존스가 배를 타고 강화도에 갔다. 그런데 배를 대고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만약 동네에서 세례식을 행하면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불태워 버린다고 했다는 것이다. 당시 강화도는 프랑스와 미국 병선이 침범하여 접전한 장소여서 외국인을 적대시하는 분위기였다. 할 수 없이 어머니를 배로 모시고 오게 하여 달빛 아래서 세례문답을 하였고 세례식을 끝마쳤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 집안은 인가귀도 되었고 강화에 처음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1892년부터 2년 동안은 배재학당의 당장을 겸하여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1892년에 이미 인천에 영화여학당을 세워 여성교육에 힘썼다. 1896년경부터 평신도들의 신앙수준 향상을 위한 사경회와 초기 지방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회를 운영하는 등 초기 감리교회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존스는 1890년대부터 신학회 교수로 활동하였고 1902년 아펜젤러가 순직한 후에는 신학회를 맡아 관리하면서 신학교 설립 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1907년 남감리회 선교부와 합동으로 \"협성성경학원\"(協成聖經學院, Union Biblical Institute)을 설립하고 초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그의 문서활동을 보면 1892년 올링거가 창간한 The Korean Repository에 많은 글을 발표하였고 1898년까지 주필로 있었다. 창간호에 \"일본 침략\"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임진왜란사를 썼고 《한국 어원학연구》를 기술하였으니 한국 역사와 언어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1901년에는 The Korea Review를 창간, 1906년까지 주필을 지냈다. 이 간행물은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활동의 기록과 한국학 연구 등에 뛰어난 공헌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한국어 최초의 월간지인 〈신학월보〉(神學月報)를 1900년에 창간했다. 1892년에는 총 30장으로 된 한국 최초의 찬송가인 《찬미가》 제1판을, 1894년에는 제2판 등을 로드웨일러와 같이 편찬하여 한국 찬송가 보급에 공헌했다.
그밖에 1897년 한국 감리교회 엡윗청년회가 처음 창설될 때 그 총무가 되어 산파 역할을 했으며 연합지도위원 5명(존스, 노블, 배재학당 대표 노병선, 제물포 대표 김기범, 상동교회 대표 이은승)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전도국ㆍ인제국(仁濟局)ㆍ학문국(學文局)ㆍ다정국(多情局)ㆍ통신국ㆍ회계국 등의 조직을 확립했다. 또한 1903년 10월 28일 서울 정동의 유니언구락부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될 때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02년 5월 하와이 사탕수수재배자협회 찰스 감독이 한국 노동자를 취업이민 시키려고 한국에 데슬러를 파견했다. 조정에서는 궁내부에 수민원을 설치하고 이민사업을 추진하였다. 존스는 한국인 하와이 이민사업에 큰 후원을 아끼지 않으므로 재미한인사회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동료 선교사들로부터는 많은 초기 교인들을 미국으로 보내 한국 선교사업에 지장을 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인천 내리교회의 교인들 다수와 유력한 초기 교인들이 이민 길에 올랐고, 신학회를 통해 교역자로서의 수양을 쌓은 홍승하 전도사가 존스의 당부에 따라 이민기독교인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파송되기도 했다.
1905년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갔을 때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그에게 \"비교종교학\" 교수 자리를 제시하였고, 일리노이 주 웨슬리안대학에서는 1906년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그를 교수로 붙들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명예로운 대학 교수자리를 마다하고 고생스런 선교지로 돌아왔다. 미국에서 돌볼 사람이 없었던 부모의 건강이 악화되자 1909년 6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귀국 즉시 \"한국 선교 25주년 기념사업회\" 총무가 되어 한국 선교 후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 선교 역사와 부흥운동을 소개하는 책자들을 발행하여 미국 교회 안에 한국 선교 붐을 조성하였다. 1913년부터는 미감리회 해외선교부 편집 및 협동 총무로 활약하면서 한국 선교를 간접 지원하였다.
1919년 5월 11일 마이애미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그의 공로를 기리는 뜻에서 1932년 6월 그의 흉상을 감리교신학교 복도에 부착하고 비문을 새겼는데 기념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趙元時 博士
韓國恩人 趙元時博士 本以美國人 渡我韓國 多年宣敎 愛人爲己
培村敎育 新學建設 自負其任 盡心努力 終以養新而歸國 主後 一九三二年 六月二十七日 監理敎神學校 白
-저서:《영한자전》(The English-Korean Dictionary);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 1907;Education in Korea:a Supreme Opportunity for the Christian Church;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찬미가》, 18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