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조종범(趙鐘範, 1884. 1. 14~1966. 1. 3)
경기도 강화읍 길상면 건직리 조정식(趙程植)과 전경선(全敬善)의 3남으로 출생. 어려서 한학 공부를 하였으며 1899년 주사라(朱思羅)와 결혼하였다. 20세가 안 되었으나 한시에 능하여 연로한 학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강화 모창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901년에 졸업하였다. 당시 강화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이동휘 선생의 권고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리고 뜻을 정하여 협성신학교에 입학, 1905년에 졸업하였다. 처음에는 강화 월오지 사립학교에 교사로 재직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8년 음력 2월 자택에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개성에서 교역하였으며 1915~1918년 입장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17년 연회학습인이 되었다. 1919년 11월 9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아 경기, 강원, 충청남.북도에서 교역하였다.
1921~1922년 대전구역에서 시무할 때인 1921년 10월 2일 장로목사 성품을 받았으며, 진천구역(1922~1924), 논산구역(1924~1927), 이천구역(1927~1928), 갈산구역(1928~1931)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교회들을 시무하면서 늘 자전거로 순회하였는데 무지한 사람들에게 핍박과 곤욕도 많이 당하였다. 하지만 온유하고 겸손하여 굳은 신앙으로 말보다 행동에 주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특별히 농촌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장남 조경원(趙敬元)을 영농가로 생활을 정착시키기도 하였다. 전도에 주력하는 한편 농촌 발전에 필요한 요건을 제시하면서 생활주변 개량, 새로운 영농방식 등을 제안하면서 협력하였다. 갈산교회에서 재임기간 동안 1931년 기와집 15칸의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같은 해 예산군 응봉면 송석리에 송석(松石)지교회를 설립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그 후 일년간 천안지방 예산구역에서 근무한 후 계속해서 삼척구역(1931~1934), 강릉구역 및 지방 감리사(1934~1935), 예산구역(1935~1937), 갈산구역 및 감리사(1937)로 시무였다.
1950년에는 충남 당진읍에 호서중학교를 설립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교육이념을 세우고 경천애인(敬天愛人), 봉사생활(奉仕生活), 노동신성(勞動神聖), 절대정직(絶對正直), 언행일치 등을 교육목표로 내세웠다. 1956년에는 호서성경학교(湖西聖經學校현 당진호서중ㆍ고등학교)를 세워 친히 교장이 되고 1957년에는 정년은퇴하였으나 별세할 때까지 학생들과 함께 교실을 늘리는 일에 손수 힘썼다. 1966년 1월 3일 오전 10시경에 84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자제 조기원은 숙명여자대학교에 봉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