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조신일(趙信一, 1901. 9. 19~1972. 10. 9)
강원도 연천군 동면 적음리에서 부친 조경숙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며 종교교육을 받았으며 1908년 세례를 받았다. 1911년 철원 삼양학교를 졸업하고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회원으로 열심히 봉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에 가담, 3개월여의 혹독한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복음 전도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하였다. 그 후 남감리회에서 복음전도사업에 헌신하여 1923년 8월 1일 전도사 직첩을 받았다. 1923년 9월 평강구역장, 1924년 9월 영평구역장으로 시무했으며 1928년 3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9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 광희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34년 3월까지 시무하였고 1934년 용두동교회, 1935년 5월 동대문교회 담임으로 부임, 1943년까지 시무하였다.
한편 1943년에는 황해도 해주 남본정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경찰에 연행되어 일제로부터 함구령을 받았고 일제 말기 일제의 교회 탄압과 정춘수의 친일 행정에 맞서다가 1945년에 투옥되어 잔혹한 형고를 치렀으며 목사직도 면직되었다.
해방 후에는 전국 순회부흥운동에 나서 \"한국 교회는 다 내 교회요 삼천리 강토가 다 복음을 외쳐야 하는 내 강단\"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초빙하는 곳이면 교파를 가리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1948년에 다시 서울 광희문교회에 부임, 1951년까지 시무하였다. 1951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총리원 전도국 총무로 선임되어 1958년 10월까지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교역자 생활비를 보조하는 등 감리교회의 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바쁜 전도국 사무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경기도 경찰국에서 예배를 인도하여 경목사업의 기초를 세웠다. 1958년 10월부터 서울 시온교회 담임으로 교역하였고, 1961년 3월부터는 서울동지방을 관리하는 전임 감리사로 활동하였다. 1963년 다시 광희문교회로 부임하여 시무하다가 1971년 3월 정년은퇴하였고 이후 감리교 부흥전도사업에 앞장섰다.
조신일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열정의 사람이었다. 그는 목회에 발을 내딛은 이후 새벽 제단 쌓는 일을 거른 적이 없었다. 또 그는 한국 교회를 끔찍이 사랑하였고 교인들을 진정으로 아꼈다. 민족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였으며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는 변함 없이 \"하나님! 제 자식들에게는 양말 한 짝을 못 얻어 신어도 좋사오니 저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믿음의 생활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경건한 신앙생활을 몸소 보여주신 목회자로 아무도 없는 빈 예배당에서 홀로 기도하곤 했다. 그리고 조신일 목사는 교인들에게 늘 \"사이클을 하나님께 맞추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야 하고, 직접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72년 10월 9일, 일선장병 위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판문점 자유의 다리에서 북녘 땅을 향해 기도한 후 애국가를 부르다 쓰러져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성동지방회장으로 광희문교회에서 이경재 목사의 주례하에 집전되었다.
-저서:《기독교와 그 진리》(역), 조선예수교서회, 1934;《인생의 여정》(역) 조선예수교서회, 1936;〈광희문교회 역사〉(필사본),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