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조병옥(趙炳玉, 1894. 2. 15~1960. 2. 10)
충남 천안에서 태어남.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1911년 평양 숭실학교,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주 킹스턴의 와이오밍고교에 입학, 1918년 졸업하였다. 이어 뉴욕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韓人會)ㆍ흥사단(興士團) 등의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 동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전임강사로 부임ㆍ봉직하던 중, 1929년 일부 교수들의 사회주의 편중 강의에 반발한 상과학생들의 동맹휴학에 학교도 공동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다 결국 권고사직되었다. 한편 1925년 신흥우 등 YMCA 중진인물들로 구성되었던 \"태평양문제연구회\"에서 함께 활동하였으며, YMCA 이사로서 지방순회 전도강연회에 동참하기도 했다.
1925년은 반기독교운동이 정면으로 부각된 해다. 기독교계는 3.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했지만,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하에서 타협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을 자초하였다. 선교사들은 일제에게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선교사들의 모욕적인 인종차별이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악화시켰다. 또한 YMCA를 비롯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도 온건노선에 머물러 민족해방운동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다. 하지만 반기독교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20년대 초반 해외에서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데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앞잡이요 침략의 선봉이며, 사회적 모순을 못 보게 만들고 노예도덕을 가르치며, 내세의 천당을 꿈꾸게 하여 현실을 망각케 하는 아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교계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해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했는데, 이때 YMCA 진보적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던 그도 \"조선 기독교의 당면한 과제\"를 포괄적으로 제시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기독교사는 이제 개척시대에서 발전적 시대로 접어들었고, 사회 및 문화환경이 새로운 상황에 놓였다. 이에 교회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당면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첫째, 조선 교회의 지위문제이다. 언제까지 선교지로서의 조선교회가 있을 게 아니라 이제는 스스로 통치하는 독립된 조선교회가 되어야 한다. 둘째, 종교와 과학의 조화 문제이다. 기독교의 운명은 과학과 악수 동맹하고 못함에 있으며, 기독교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과학을 기독교로 조화함이 우리의 의무다. 셋째, 사회사조와 운동에 대한 태도 문제이다.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기에, 기독교는 마땅히 사회운동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갖고 사회를 이끌어가야 한다.\"(〈기독신보〉, 1925. 12. 30)
또한 그의 기독교적 태도는 매우 사회 참여적인 적극성을 띠고 있었다. 그는 YMCA 기관지인 〈청년〉에 \"종교가도 혁명가가 될 수 있을까\"(1927. 3), \"십자가의 무사\"(1928. 4) 등의 논문을 발표해, 불의와 악에 저항하는 데서 기독교가 무력의 수단을 쓰는 것이 기독교의 교훈 표준에서 죄라 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또한 기독교가 무력으로서의 사회변혁을 도모해야 하는 혁명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강경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외적인 경제적 환경 변화가 평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영적인 속죄를 통해서만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김창준 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따라서 YMCA 활동 노선에서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없었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新幹會) 조직에 참여, 창립위원ㆍ재정총무를 역임하였다. 신간회는 민족적ㆍ정치적ㆍ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ㆍ집회ㆍ결사ㆍ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ㆍ여성의 평형운동 지원, 파벌주의ㆍ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처럼 신간회의 세력이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그를 비롯해 이관용(李灌鎔)ㆍ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고, 그는 실형을 선고받아 3년간 복역하였다. 1932년 조선일보사 전무 겸 영업국장에 취임하였고, 1937년 수양동지회(1926년 1월 설립된 흥사단 계열단체) 사건으로 체포되어 2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다 석방 후 친일행각에 동참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창당된 한국민주당에 참여하는 한편, 그 해 10월 미군정하에서 초대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9년 1월까지 활동하면서 제주 4ㆍ3사건 진압 등을 주도하였다. 1948년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엔 한국 대표로 활동하였다. 1950년 6.25전쟁 직후인 7월, 제5대 내무장관으로 취임하여 대구 사수의 진두지휘를 담당하기도 했으나, 그 후 대통령 이승만과의 의견충돌로 1951년 5월에 사직하고 반독재투쟁에 나섰다. 1952년 1월 피난지 부산에서 〈자유세계〉(自由世界)를 발행하여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신랄히 비판하는 시사논문을 주로 실어 갈채를 받았고, 문예면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여 전란을 겪고 있던 피난지의 문인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나, 이듬해 6월 제2권 제3호를 끝으로 종간하였다.
1951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제16대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야당을 지도하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재선되었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선거를 1개월 앞두고 미국의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에서 치료받던 중 별세하였다.
초기 기독교 변증론자였던 노병선 선생의 맏딸이자 진명여학교 교사였던 아내 노정면(盧禎冕)과의 사이에 2남을 두었으며, 장남 윤형(尹衡)은 전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고, 차남 순형(舜衡)은 현재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중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