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정춘수(鄭春洙, 1874. 2. 11~1951)


감독

충북 청주에서 출생. 1882~1897년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29세 되던 해인 1903년 원산 남산동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의 감화를 받고 결신을 했으며 그 이듬해 6월 세례를 받았다. 이때부터 전도활동에 나섰고 1905년에는 남감리회 매서인으로 활약하였다. 1906년 전도사 직책을 받고 교역에 나서 개성북부교회에 부임했다. 1907년 수표교 임시강습소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곧 협성신학교에서 수학, 1911년 졸업하였다(제1회). 그 후 1913년까지 서울 종교교회를 담임하였으며 그 해부터 1916년까지는 개성북부교회, 1919년까지는 원산 상리(上里)교회 담임으로 각각 봉직했다. 3.1운동 당시 오화영ㆍ박희도 등의 권고로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원산지역 만세운동을 사전 계획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거사현장이나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경찰에 자진 출두, 체포되었다. 특히 법정진술에서 \"조선자치\"의 의미가 독립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원조를 받자는 의미이고, 차후에는 최초 목적을 달하지 못한 점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에 종교사업이나 하겠다는 심경을 밝혀, 그의 3.1운동 민족 대표 참여가 소극적이었으며 그의 독립정신 역시 투철하지 못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1년 6개월을 복역한 후 1922년부터 개성북부교회에서 시무했고 1924년 개성중앙교회, 1926년 춘천지방 장로사(현 감리사), 1934년에 서울 수표교교회 목사와 총리원 이사 등으로 시무하면서 행정수완을 발휘했다.

1939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감독에 선임되면서 가속되는 일제의 압력에 굴복, 그들과 오히려 영합하는 친일, 반교단 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정춘수는 일제의 제의대로 한국 감리교회와 일본 메도디스트교회의 합동을 추진,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형성했다. 또한 그는 일제의 전시체제에 맞춘 교단정비를 서둘러 어용 기독교회로 타락을 도모했다. 즉 1940년 10월 이사회에서 이른바 \"혁신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골자는 신학교의 무기휴교, 기독교교육과정 중 신체제 순응하는 내용, 이에 상응하는 교사진의 개편 등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혁신 5조항을 채택했는데 \"사상선도, 교학쇄신(군사교련, 신학교육), 사회교육(황도선양ㆍ방공ㆍ국방), 군사후원, 기관통제\"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조선감리교단의 통리 자리에 오른 정춘수 목사는 이 모든 친일적 조처의 선봉에 섰으며 1941년에는 여선교회와 연회를 해산하고 모든 조직의 명칭과 제도마저 일제의 요구에 따른 형태로 바꾸었다. 그 후에도 신학교의 개편, 전시대응조처, 각 교회당 시설의 군사적 활용 허용, 철제물의 헌납, 전시대응 강의, 모든 선교부 재산의 적산선포, 지원병제도 채용, 일본 군용기 헌납헌금 강제 징수, 연성회(교역자를 대상으로 한 일본화교육) 실시, 황도문화관 설치, 교회의 통폐합, 일부 교회의 매각처분 등 교회나 성직자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한편 1942년에는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 채택을 주동한 류형기ㆍ구성서ㆍ전효배ㆍ정일형ㆍ송흥국 목사 등이 일제 당국에 구속, 형고를 겪는 것을 조장, 방조하였다.

해방 이후 그는 설 자리를 잃었고 마침내 개인적 이유를 들어 천주교회로 개종해 버렸다. 개종 이후 \"나는 왜 천주교인이 되었나\"라는 주제로 대외적 기고를 했는데 여기서 그는 일찍이 천주교회의 오묘한 진리를 알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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