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정일형(鄭一亨, 1904. 2. 23~1982. 4. 23)
평남 진남포 앞바다 제도에서 부친 정기찬과 모친 하은총 사이에 3대 독자로 출생.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일찍이 진남포 삼존학교를 다녔는데 이곳에서 정일형은 기독신자가 되었으며 성경과 찬송가를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집성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이어서 수안 공립보통학교와 삼숭학교를 거쳐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교회의 종지기 등으로 생활하면서 1922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27년 3월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감리교총리원 교육국에서 근무했으며 2년 뒤인 1929년 미국 유학을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진남포의 덕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그리고 뉴욕대학 신학과와 오번대학교 종교교육과와 드루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정일형은 1935년 동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신리교회에 담임하였다. 그는 평양 근로자들이 많은 공장지대에 신리교회를 개척하여 이곳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감리교 총리원에서 주최하는 금강산 외금강 수양회 강사로 갔다가 이태영을 만나 1936년에 그녀와 결혼하였고 1937년부터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숭실전문학교 그리고 감리교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 반대 등 배일사상의 선도자라는 죄목으로 1940년 일경에 체포되어 해방 전까지 5년 동안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미군정 과도정부의 인사행정처장 및 물자행정처장으로 일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초대 특사단 부사로 구미 각국을 순방하며 독립 사실을 주지시켰고, 그 해 10월에는 제3차 파리 UN총회의 한국 대표로 참가, UN의 한국 독립 승인을 획득했다. 1949년 국제연합한국협회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되고 1950년에는 대한통신사(UPI) 사장에 선임되었다. 1951년 제6차 UN총회에 참가, 한국 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그 해 제2대 국회의원으로(중구을) 피선,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국회 외무위원장 및 간사로 의정 외교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1954년 범야 민주세력을 단합, 창립한 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이듬해 민주당 서울시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투쟁했으며 1959년 5월에는 국회 언론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4.19의거 후 제2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5대 국회의원(중구을)이 되는 동시에 내각에서는 수석 국무위원으로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1년 2월에는 필리핀 정부의 문화훈장과 아담스대학의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민주당 재건에 관여했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65년 한일협정에 반대,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1967년 제7대 국회에 진출하는 한편 신민당 부총재로 선임되었다. 특히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독재 견제와 민주 투쟁에 혼신을 다했고 이에 따라 많은 활동의 제약과 위협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선봉에 서서 정면투쟁을 계속했다. 1973년 신민당 대표 권한대행에 추대되고 제9대 의원에 당선, 8선 의원이 됨으로 한국 의정사상 최다선 의원의 기록을 세웠고 가장 긴 의회 활동을 했다. 1977년 3월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3.1절 민주구국선언에 참가한 것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3년 징역을 언도받고 의원직은 물론 공민권까지 박탈당했다. 그 동안 정치활동 이외에도 각종 국제단체와 적십자, YMCA, MRA 등 사회단체활동에 참여했고 1973년 6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성서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10ㆍ26사태 이후 복권 조치되었고, 1981년 5월에는 모교인 미국 드루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4월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해 별세하였다.
-저서:《UN과 한국》, 1949;《UN의 성립과 업적》, 1952;《한국문제 UN결의문집》, 1954;《제11, 12, 13, 14회 UN총회 업적》;《국제연합 독본》, 1961;《UN과 한국문제》, 1961;《오직 한 길로》, 신진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