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효배(田斅培, 1885. 1. 16~1950 ?)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삼흥리에서 유명한 유학자 전병규(田炳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와 함께 개종한 후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상동교회에서 경영한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고, 부친이 설립(1918)한 고향의 흥천(興天)학교 교사로 교육에 종사하다가, 3.1운동 후 목회에 뜻을 두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제14회로 졸업하였으며 곧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교에 재학중이던 1922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삼청교회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여기서 특히 교인들의 기도생활에 중점을 두고 지도하였는데, 1923년 2월 그가 인도한 삼청교회 \"특별기도회\" 소식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경성부 삼청동교회에서는 2월 20일부터 28일까지 특별기도회를 열고 오전 5시마다 새벽기도회를 권사 박경환 씨가 인도하고 오후 7시 반부터 부흥회를 전도사 전효배 씨가 인도하였고 낮에는 교우 집을 심방하여 매일 순회하며 가족사경회를 열었는데 모인 인원은 48인으로 97인까지 모이었고 일반이 특별한 은혜를 받아 애통하고 죄에서 돌아선 자가 많으며 새로 믿은 자 10인이라더라.\"(\"삼청동 특별기도회\", 〈기독신보〉, 1923. 4. 11)
이 당시 그는 위 기록에 등장하는 평신도 지도자 박경환, 1922년 연회에서 삼청교회에 파송되어 본격적으로 여성선교를 추진한 여선교사 컨로우(M.L. Conrow) 등과 호흡을 맞춰 목회하였고 그 결과 삼청교회는 오랜 침체를 벗고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그는 2년간의 삼청교회 목회를 마치고 1924년 9월, 왕십리교회로 파송, 부임하였다. 이때 왕십리교회는 목회자 주택도 없어 유치원장 이완식 씨의 사랑채를 주택으로 사용하던 중이었는데, 1925년경 왕십리 유지로서 왕십리교회에 출석하던 김진선 씨가 주택 마련을 위한 기금을 희사하여 목사관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김진선 씨는 교회의 종이 없음도 섭섭히 여겨 교회의 종까지 달도록 주선하였다.
1928년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이듬해인 1929년 9월 용두동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는 부임 후 청년지도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 청년회를 재조직하였다. 청년들끼리 모여 정기적으로 성서연구를 하게 하고, 교회 봉사와 건전한 오락을 장려했으며, 그들을 통해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용두동교회는 많이 젊어졌고 선교활동도 활발해졌으며, 청년회를 중심으로 성가대가 조직되어 주일예배를 도왔다. 한편 중단된 유치원도 다시 개원하도록 하여 이후 많은 어린이를 교육하였다. 또한 부임 후 목사관과 전도부인 주택이 없어 신축하니, 목사관은 예배당 곁에 9평 함석집을 지었고 그 곁에 전도부인 주택 8평 초가집을 지었다. 이로 인해 목회자가 교회 가까이 거주하니 교인들의 관계가 더욱 밀접하고 친밀해졌다. 그는 교회행정에도 능하여 1932년 용두동교회의 교적부를 정리하고 교인들의 정확한 인적상황과 이동상황을 후세에 남겨놓으니 오늘까지 그 교적부가 보관되어 있다. 일정한 양식으로 전국 감리교회에 배부한 것으로 보이는 이 교적부의 제목은 \"기독교조선감리회 교적부 용두동교회\"며, 기록형식은 먼저 신위(호주, 처자 등의 가족관계), 씨명, 생년월일, 성별, 직업, 주소, 학습연월일, 주례목사, 세례연월일, 주례목사, 입교연월일, 주례목사, 비고의 순으로 되어 있다.
용두동교회 부임 4년 뒤인 1933년 3월, 정동제일교회에서 회집된 제3회 중부연회에서 동대문교회로 파송받았다. 1930년대 들어서 동대문지역의 인구증가, 교회에 대한 인식도 상승, 동부지역 중심 교회로서의 위상, 교인들과 임원들의 열심있는 기도와 전도 등에 힘입어 교세가 부흥하기 시작한 동대문교회는 그의 재임 시에도 꾸준히 성장해 갔다.
2년 뒤인 1935년 4월 그는 다시 용두동교회로 경동지방 감리사를 겸하여 부임했다. 당시 용두동교회는 증축의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그의 부임 후에도 그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이 당시 신영희 전도사와 이다가 속장, 김도경 전도사 등 10여 명은 매주 화요일 저녁 교회에 모여 2, 3년간 계속 증축을 위해 기도하였고, 그 결과 1천여 원에 달하는 헌금이 모아졌다. 하지만 증축에 충분치 않아 계속 헌금과 기도를 하던 중, 전 목사는 1935년 5월 광희문교회로 전임해 갔다.
성품이 강직하고 정의감이 투철했던 그는 일제 말기에 남다른 수난을 겪었다. 1942년 10월 총회를 앞두고 이 난국에 한국 감리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는 양주삼 박사밖에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그는 류형기, 정일형, 송흥국, 구성서 등과 함께 양 박사 감독 선거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옥고를 치렀으며 목사직도 면직되었다. 한편 이들이 재판을 받는 동안 열린 총회에서는 정춘수 통리자의 후임으로 김영섭 목사가 선출되나 소동으로 휴회되었고, 2개월 반 후 총회를 재소집한 정춘수 통리자는 사전 모의에 의해 변홍규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후 변홍규 통리자는 일제에 아부하며 교회가 전쟁수행의 앞잡이가 되도록 촉구했다.
해방 후 복권된 전 목사는 1946년 재차 광희문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면서 감리교 재건에 앞장섰다. 복흥파와 재건파의 대립 시에는 재건파에 가담하여 재건 동부연회장을 지냈고, 두 파의 대립이 화해되고 합동이 실현된 이후에도 동부연회장의 직책을 맡아 수행했다.
1949년 금호동교회 시무중에 6.25전쟁을 겪었는데, 그 해 8월 23일에 인민군 정치보위부원에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납북된 것으로 보이며 종래는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인배 여사와 그 사이에 장남 종철, 차남 종옥을 두었다. 차남 종옥은 부친의 뒤를 이어 감리교 목사로 총리원 교육국 총무 등 여러 기관의 책임역을 거쳐 배재중\"고등학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미국 버팔로에서 아름다운동산교회를 담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