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태일(全泰壹, 1948. 8. 26~1970. 11. 13)
경북 대구에서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미 유아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겪으며 부모의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고, 양복 만들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54년 빈손 들고 무작정 상경, 염천교 밑에 살며 동냥으로 연명했다.
어느 날 실업자로 전전하던 아버지가 불쑥 3천 원의 거금을 내밀었고, 행상을 시작한 어머니는 2년여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천막집과 재봉틀 한 대를 마련했다. 이후 아버지도 다시 일을 시작해 그나마 끼니는 거르지 않게 되었다. 태일의 나이 8세 무렵이었다.
1960년 그가 남대문국민학교에 편입하여 4학년이 되었을 때, 또다시 집안이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낙담한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난폭해졌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해 초 학교를 중퇴한 그는 동생 태삼을 데리고 삼발이 장사를 시작, 몇 달을 행상으로 떠돌며 발이 부르트도록 일했지만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되레 빚만 늘어났다. 이듬해 가난에 짓눌린 그는 가출을 선택했다. 1년여 서울을 떠돌다, 무심코 내려간 부산에서 배고픔을 못 견뎌 물에 빠진 배추를 건지려다 죽을 뻔한 일을 겪고는, 대구에 있는 외갓집을 찾아갔고, 뜻밖에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다.
1963년 봄, 15세의 그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재봉일을 돕고 저녁에 공부하느라 피곤했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가난으로 인해 배움을 중단하였다. 이후 또다시 시작된 아버지의 술주정에 지친 가족들은 정처 없이 헤어졌다. 먼저 어머니가 돈 벌러 상경하였고, 이어 그가 막내 순덕을 업고 상경하였다. 막내를 사회시설에 맡긴 채 1년여간 떠돌던 그는 거지로 변해 있는 동생 태삼을 우연히 만나고, 이후 어머니가 있는 곳도 알게 되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던 순옥이도 만났다.
1965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하였다. 가족이 함께 살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그는 일을 빨리 배웠고,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면서 월급도 3천 원으로 대폭 올랐다. 1966년 가을, 통일사에 월급 7천 원의 미싱사로 전직한 그는 곧 재단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후 개인적 가난 이상의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평화시장의 3만여 노동자들이 생지옥 같은 환경에서 과로와 질병에 시달리며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을 착취당하면서도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채 조금씩 생명을 갉아 먹히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재단사가 되어 시다와 미싱사에게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임금도 잘 받게 해주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가진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 가을, 한미사 재단보조로 다시 취직하였다.
1968년 다른 회사로 옮겨 재단사로 일하던 그는 아버지에게 지난날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담을 들으면서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고, 평화시장 재단사를 주축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모임을 준비해 갔다. 이윽고 1969년 6월, \"바보회\"의 창립총회가 그의 집에서 열렸다. 평화시장 최초로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자생적인 노동자들의 모임이었다. 최초로 한 일은 평화시장 내 노동실태 조사였다. 약 3백 매 중 업주들의 방해로 30매 정도가 걷혔다. 이를 근거로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찾아갔지만 참혹한 냉대와 무시만 당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절망을 안고 돌아섰다.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것은 업주만이 아니라 근로감독관, 노동청, 정부, 모두였던 것이다.
평화시장에서 쫓겨난 그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을 했다. 하지만 늘 평화시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1970년 9월 그는 다시 평화시장에 나타났고 재단사로 취직하여 새로운 모임 \"삼동친목회\"를 조직했다. 또다시 노동실태조사 설문지를 돌려 1백 26장을 거두었으며 90명의 서명까지 받아 그 해 10월 6일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 눈물겨운 노력 끝에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리도록 했다. 이를 시작으로 삼동회는 평화시장 근로개선 작업을 본격화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업주와 노동청, 경찰들의 거짓말과 회유, 협박, 감시뿐이었다.
결국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미 수많은 전투경찰들이 평화시장을 에워싸고 있었고, 업주들은 노동자들의 참여를 제지했다. 그래도 데모 소식을 들은 많은 노동자들이 평화시장에 모여들었고 삼동회원들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내 플래카드는 경찰에 빼앗겼고 데모는 점점 힘든 상황이 되어갔다. 이때 전태일이 아무도 모르게 온 몸에 휘발유를 붓고 성냥을 그었다. 불이 붙은 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소리치며 평화시장 앞을 내달렸고, 이내 쓰러졌다. 모든 것이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고 친구들은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순간 다시 벌떡 일어난 그가 외마디를 쏟아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경찰들은 그저 지켜볼 따름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어머니, 친구들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배가 고프다\"는 말로 노동자의 처지를 대변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을 불살라 시대의 어둠을 밝히려던 그의 노력은 마침내 1970년대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불꽃이 되었다. 또한 창현교회(현 갈리리교회) 교인이었던 그의 죽음은 기독교운동에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 이후 한국 교회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은 그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참고문헌:조영래, 《전태일평전》,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