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영택(田榮擇, 1894. 1. 18~1968. 1. 16)
평양 사창골에서 부친 전석영과 모친 강순애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남. 일찍부터 개화된 서북지방의 선각자였던 부친은 인정이 많아 주변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으며, \"나보다 약한 사람, 내게 부림을 받는 사람을 괄시하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부친에게서 정신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14세 되던 1907년, 부친의 권유로 입학한 평양 대성학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진실\"을 삶의 밑거름으로 간직하게 된다. 1909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듬해인 1910년 대성학교를 중퇴하고 실의에 잠겨 있다가 \"문학\"을 접하는 한편, 작은형의 인도를 받아 교회에 나가 김창식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1년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관립의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집어치우고 1912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열정적 신앙인이었던 그는 1912년 동경의 청산(靑山)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여 2년 후 고등학부까지 졸업하였다. 이어 청산학원 대학의 문학부(1915~1918)를 마치고 그 해 동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이 시절 그는 교회의 비합리적인 사상과 행동에 거부감을 갖는 한편, 김동인ㆍ주요한ㆍ김환 등 문인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참가하는데, 창간호에 그의 처녀작 \"혜선(惠善)의 사(死)\"를 발표하였다. 이 무렵 교회를 비판하는 문학 청년들이 많았던 상황 속에서도 늘봄은 문학과 신학의 양립을 도모하였고, 결국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흐르는 기독교 인도주의 문학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19년 동경유학생독립선언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눈을 피해 3월 말 일시 귀국하여 4월 29일 이화학당 출신 채혜수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날 채혜수가 3.1운동 가담이 탄로나 일경에 체포되는 통에 9개월간 아내 옥바라지를 하고, 이듬해인 1921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신학부에 재입학, 30세 되던 1923년 청산학원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창문사에서 발행한 〈신생명〉의 주간으로 일하는 한편, 1924년 죽첨정(현 충정로)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중앙교회, 창천교회 소속으로 목회를 도왔다. 1927년 5월 감리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듬해인 1928년 10월 아현교회에 부임하는데, 행정적인 구역 담임자였을 뿐, 실질적인 목회는 김영렬 목사의 지원을 받는 \"공동목회\" 체제였다.
1929년 미국 유학을 위해 신학교와 교회를 사임하고, 1930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퍼시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시카고에서 흥사단에 입단, 독립운동에도 헌신했으며 1932년 12월 퍼시픽신학교를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1933년 황해도 봉산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했는데, 이때 가난과 교회 내 알력, 선교사와의 불화로 인해 극심한 고생을 겪었다. 1935년 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이사하여 집필에 전념하였다. 곧 기독교 문서사업에 뜻을 두어 1937년 1월 교계 개인잡지 〈새사람〉을 창간하는데, 그 해 6월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됨으로 정간되었다(1946년과 1955년에 〈새사람〉을 복간했으나 재정적 부담 등으로 오래지 않아 재정간 됨).
한편 검거 뒤인 1938년 6월 그를 비롯한 현제명, 홍난파 등 수양동우회원 18명이 변절하여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인 1939년 10월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의 오점을 남겼다.
1938년 〈기독신문〉의 주간을 맡다가, 1939년 이후 평양 근교에 은거하면서 평양요한학교와 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봉직했고, 1942년 평양 신리교회를 담임하던 중 1944년 배일설교로 수감되었다가 출옥하니 신리교회가 폐합당해 설자리조차 잃는다.
1945년 해방 후 조선민주당 문교부장이 되고, 그 해 12월에 월남하여 이듬해인 1946년에 미군정 문교부 편수관이 되었다. 1947년 국립맹아학교장, 1948년 중앙신학교 교수, 1952년 도일하여 동경 〈한국복음신보〉 주간, 귀국 후인 1954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정계ㆍ관계ㆍ교육계ㆍ언론계ㆍ출판계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폈다. 이 시기 창작에도 손을 대 40여 편의 단편과 1편씩의 중\"장편을 발표했다.
1961년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고, 단편 \"금붕어\"로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상 대통령상을 수상했고 이후 기독교계명협회장을 역임했다. 1968년 1월 16일 종로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고, 크리스천문학가협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금촌에 묘비가 세워졌다.
늘봄의 문학과 생애는 일관되게 기독교적 인도주의 관점을 견지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도주의와 그 맥을 같이하나, 그 속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구속적 은혜를 통한 인간이해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그 주변 인물들은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 방식과 어우러져 있으며 그의 \"인간사랑\"을 대변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된, 그리고 예수의 삶을 따르려는 그의 노력과 신앙적인 열정이 그의 문학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새사람〉 출간을 통한 \"새사람운동\"으로 나타난다. 새사람운동은 다름 아닌 \"진실성의 회복운동\"이었다. 그 생활강령(1. 매일 성경을 읽자 2. 거짓말을 하지 말자 3. 겸손하고 깨끗하게 살자)만 보아도 하나님과 인간 앞에 진실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을 살필 수 있다(1946년 재창간 이후 제9호부터 편집후기에 실림).
그는 문학을 신앙의 도구로 사용하길 원했고, 그의 재능을 \"새사람 만들기\"에 쏟아 부었던 것이다. 다음 글에 그의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이 잘 나타나 있다.
\"아아 우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자. 괴롭고 어지럽고 아니꼽고 더럽고 무서운 이 세상을 변하여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로 힘쓰자. 썩어진 우리 사회로 하여금 화하여 깨끗하고 신선하고 선량한 사회를 만들기로 힘쓰자. 그리하기를 위하여 우리는 각각 물러가서 먼저 스스로 거듭나기를 힘쓰자. 각각 그 생명을 개조하자. 먼저 우리는 우리들의 생명을 개조하여야 하겠다. 그리하여 모두 새사람이 되어야 하겠다.\"(전영택, \"생명의 개조\", 〈전집 제3권〉, 355쪽)
-저서:《전영택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