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수진(全壽鎭, 1905. 11. 24~1985. 2. 25)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1920년 호수돈여자보통학교, 1924년 호수돈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4월 이화여자고보의 교사로 취임해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38년 4월 경기도 경찰국에서 영어와 성경시간에 배일사상을 고취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은 후 일제와의 어떤 타협도 거부하고 교직에서 물러났다.
해방 이후 1948년 9월 이화여자대학 강사로 교단에 다시 섰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대학, 스카릿대학, 코빌대학 등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1953년 4월부터 이화여대 교수로 봉직했으며, 그 해 9월 배화여자중\"고등학교장에 취임했다.
취임 이후 6.25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학교의 시설 복구와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기독교교육을 재개해 교목제도를 도입하여 1953년 초대 교목으로 유동식 목사가 부임했다. \"한국 여성으로서 학력과 신앙을 갖춘 인물을 육성하여 교회와 학교를 지도할 일꾼을 길러내는 데 목적\"을 둔다는 캠벨 여사의 건학 이념을 바로 세웠고, 또 교훈을 재정함에 있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믿음ㆍ소망ㆍ사랑\"으로 정하고 구체적인 실천항목으로 \"인격 완성을 믿음으로, 인류 행복을 소망으로, 생활 실천을 사랑으로\"라는 교훈의 구체적 실천사항을 명기했다.
1960년 4.19학생의거 때 배화학교 교장을 사임하여 인천의 영화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3년 10월 배화학교 15대 교장으로 재취임하여 1973년 3월 퇴임할 때까지 강당, 과학관, 중학교 교사의 신축, 도서실 확장, 본관 중수 등 시설확장에 힘썼다. YWCA연합회 이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했고,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배화학원의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85년 별세하여 학교장(學校葬)으로 장례식을 갖고 충남 대천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