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삼덕(全三德, 1843~1932)
평남 강서 벽위에서 양반집 딸로 태어남. 17세에 같은 강서면 왁새말(岩底里)에 사는 김선주(金善柱)와 혼인하였다. 전삼덕은 서북사람으로는 드물게 중앙 정부의 신임을 받아 벼슬살이하는 남편을 따라 1885년 서울로 왔다가 남편이 보령군수로 부임하자 보령으로 갔고 1890년경 남편이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정착하게 됨에 따라 그도 강서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집 부인으로 좀처럼 문밖 출입을 할 수 없는 규방생활은 그에게 외로움을 가져다주었고 여기에 남편이 젊은 여인을 첩으로 들임에 따라 전삼덕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전삼덕의 삶에 전기(轉機)를 마련해 준 사건이 1893년에 생겼다. 바로 평양에 들어와 있는 예수교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저 호기심으로 한번 믿어 볼 생각으로\" 남편과 시집 식구의 눈초리와 가문의 체면을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 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80리 평양 나들이 길을 떠났다. 당시 평양에는 미감리회 의료선교사 홀(W.J. Hall)이 병원을 통한 선교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홀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알고자 스스로 찾아온 전삼덕을 정성스럽게 맞이하였다. 마침 홀의 집에는 최초 감리교인이 된 오석형이 있었는데 그는 강서에 살았던 인물로 전삼덕은 그에게서 기독교 진리를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전삼덕은 홀에게 〈신덕경〉, 〈세례문답〉, 〈미이미교회 문답〉등을 받아 개인적인 구도(求道)생활을 시작하였고, 집에 돌아와 두 며느리를 전도하였다.
2년 동안 남편과 시집 식구들의 방해를 받아가며 남산현교회 예배에 참석한 전삼덕은, 평양감리사로 활동한 스크랜턴(W.B. Scranton)에게 서북지방 여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1895년 오석형ㆍ김창식ㆍ이은승을 대동하고 전삼덕의 집을 방문한 스크랜턴은 전삼덕의 남편을 전도하려 하였으나 그의 완고한 마음을 꺾지 못했고, 전삼덕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남녀유별(男女有別)이 강조되던 풍속으로 인해 스크랜턴과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방 한가운데 휘장을 치고 머리 하나 내놓을 만한 구멍을 낸 후에 그리로 머리를 내밀어 세례를 베푸는 진기한 장면이 펼쳐졌다. 전삼덕은 작은딸과 함께 세례를 받은 후 더욱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였고 얼마 후에는 두 며느리까지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다. 4, 5년이 지난 후에는 그의 두 아들 김익수(金益洙), 김진수(金晋洙)의 물질적인 후원과 평양 출신의 전도인 김재찬(金在燦)의 주동으로 강서읍교회를 설립하였다. 강서읍교회가 설립된 이후 전삼덕은 더욱 활발한 교회활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는데, 김재찬의 부인 노살롬과 함께 교회 안에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고 평양에서 매년 개최되는 여자사경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전도인으로서 훈련을 쌓았다.
1901년 평양지방 여선교회 사업을 관장하기 위해 부임한 여선교사 에스티(E.M. Estey)는 전삼덕을 함종(咸從)에 전도인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장병일 권사와 함께 함종에 가서 전도하며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성실히 전도했고 그러한 노력으로 교인 수가 늘고 교회도 설립되었다. 그는 1910년까지 함종에서 전도부인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에 건강이 약해져 전도부인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여 1917년 학동(鶴洞)교회를 설립하였고 학교도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숭덕(崇德)학교다. 그는 이 학교의 학감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남존여비 풍조가 심해 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자아이들의 교육을 강조하며 집집마다 다녔고, 찾아오는 여자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쳐주었다. 고향에서 10여 년 전도한 결과 교회도 크게 성장하였다. 그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은 6백 명에 이르며 그 중에 교회와 사회 각계 각층에서 지도급 인물로 성장한 사람도 많았다.
1925년 2월 27일 그의 전도로 설립된 강서ㆍ함종ㆍ삼화 등지의 9처 교회가 연합하여 학동교회에서 \"전삼덕 여사 전도 30주년 기념식\"을 베풀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를 안 후로 나는 자주한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