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밀라(全密羅, 1908. 10. 15~1985. 10. 30)
전밀라는 한국 여자로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일생을 하나님께 바쳤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실천한 목회자였다. 또 여성해방의 길을 여는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여성운동가였다.
전밀라는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 179에서 전연득의 5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5, 6세 되던 때에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는데 부모 형제들의 핍박을 받자 고향을 떠나 충주에 정착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가정기도회를 갖는 등 철저한 신앙생활로 자녀를 양육하였고, 나중에는 성서공회 소속 권서로 충주 청풍 제천 원주에서 활동하였으며 청풍교회에서는 담임자로 시무하기도 했다.
전밀라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소 늦은 12살 때 충주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 것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초등교육을 마친 후에는 공주 영명여학교를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1년 영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여 감리교신학교에 진학하여 신학훈련을 받은 후 1935년 3월 19일 졸업하였다(제18회, 4년제 제3회).
신학교 졸업 후에는 본격적인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목회는 1935년 4월 30일 기독교조선감리회 동부연회에서 임은임, 정복주, 전순덕, 이규선 등과 함께 \"전도부인\"으로 임명받음으로 시작되었다. 마침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해인 1934년의 총회에서 전도부인에 대한 규칙이 제정되어 전도부인의 위상이 확립되었다. 이전까지는 한국 교회 성장의 밑거름 역할을 한 전도부인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을 뿐 아니라 교회 조직 안에서도 소속과 위치가 분명치 않았다.
전도부인으로 임명받은 전밀라는 원주지방 내 30여 교회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에 헌신하였고 여선교회를 조직, 지도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 자신이 여선교회 원주지방연합회 총무를 맡는 등 이때부터 전밀라는 그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여선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으며 활동하였다. 1939년에는 모리스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신학부에서 1년간 수학하고 돌아왔다. 1940년 4월부터는 원주제일교회 전도사, 1942년 4월부터는 원산중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남산교회, 인천 창영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전밀라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목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그때 나는 인천 창영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 귀퉁이가 부서진 교회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고막이 찢어지는 듯한 대포소리와 함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떨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얘기가 없더군요. 그때 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답니다.\"
다행히 감리교는 장로교와는 달리 목사 안수에 있어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 다만 목사로 안수받기 위해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담임자로 시무하면서 3년 동안 과정 심사와 자격 심사를 통과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1년 인천에 갈월교회를 개척하고 담임 전도사로 시무하며 목사의 길을 준비하였다. 당시는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을 쉽게 용납하던 시기가 아니어서 남자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선입견을 극복하고 1953년 준회원에 허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중부연회에서 명화용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5년 3월 13일은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들어온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자 목사가 배출된 날로 한국 감리교회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여성운동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날이다(한국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의 여자 목사 안수는 1931년 감리교연회에서 여선교사들에게 주어졌다. 1951년 재건교회의 최덕지가 목사로 안수받기는 했지만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한 것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197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은 1996년에 여자 목사가 배출되었다). 이로써 여자들에게도 남자 목회자와 동등한 성례집행권과 목회권이 주어져 여자 목사 배출의 문이 열렸다. 목사 안수 후에는 인천 창영교회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960년부터 1966년까지 7년 동안 서울 양광교회를 담임하였다. 당시 개척 교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양광교회에 부임한 그는 주택을 마련하고 예배당을 건축하여 교회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여자 목사였기에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그는 어려울 때마다 빌립보서 1장 20절을 수없이 외우며 난관을 넘어갔다.
1966년 4월부터는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총리원 부녀국 총무 겸임)로 피선되었다. 이때부터 1974년 4월까지 8년간 활동하면서 여선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헌신했다. 그는 지방여선교회 총무, 전국연합회 부회장, 위원장, 총무, 자문을 맡는 등 여선교회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다시 양광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979년 3월 정년으로 은퇴하였고 오랜 병고 끝에 1985년 10월 30일 별세하였다. 1986년 4월 여선교회 전국대회 기간 중에 그의 추모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이때 유족들이 회관 신축 건립 기금을 헌금하여 여선교회 회관을 건립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감리교신학교와 인천 영화중ㆍ고등학교, 배화중ㆍ고등학교, 명덕학사 등의 재단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숙명고등학교에서 \"개척자상\"(1959)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종교인상\"(1968)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밀라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목회와 여선교회 사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감리교회의 일꾼이었다. 또 그는 남녀차별의 봉건적 구조를 깨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선구자의 길을 걸은 여자 목사였다. 이러한 큰 공헌을 남김에도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겸손을 잃지 않은 순결한 영혼을 간직하고 있었다.
\"크게 일한 것도 없고, 반면에 잘못도 없이 이렇게 오늘까지 살아온 자취도 다만 하나님만 아실 뿐입니다. 모든 일에 천승스런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임하면, 스스로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저서:《또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양광교회,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