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전덕기(全德基, 1875. 12. 8~1914. 3. 23)
전덕기 목사는 한국 교회사와 한국 역사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살았으면서도, 민중과 함께하는 복음의 생활을 이루었고, 민족의 문제에 과감하게 자신의 몸을 던지는 생활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9살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숯장사를 하던 숙부 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1892년 스스로 미감리회 선교사인 스크랜턴을 찾아가 그의 집에서 일하였다. 이후 그의 삶이 변화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고 1896년에는 세례를 받아 스크랜턴의 동역자가 되었다.
1897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 성장하였고,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불우한 형편의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01년에는 권사직을 받았고, 1902년에는 전도사로 임명되어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당시의 교역자 양성 과정인 "신학회"에 참석하여 신학훈련을 받은 후 1911년에 다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 가을에 졸업하였다. 1905년에는 집사목사로 안수받고 스크랜턴의 뒤를 이어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상동교회가 위치한 남대문 일대는 소외된 민중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전덕기 목사는 그들을 찾아가는 현장 목회를 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민중이 생활하는 곳에서 민중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다.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이 그의 주된 목회 대상이었다. 항상 나막신, 쑥 가루, 관을 준비하고 있다가 버려진 시체를 염하고 장례를 치렀으므로 가난한 집에서는 초상이 나면 으레 그를 찾았다고 한다.
전덕기 목사에게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청년운동을 지도하며 이끌었다는 것이다. 상동 엡윗청년회(Epworth League)는 1897년 9월 5일에 조직된 청년회로 "말랄류 지파"(Mallalieu Chapter)로 불리며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대표적인 단체였다. 전덕기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 청년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우리 청년회 회원들은 셩신의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깊히 든 잠을 속속히 깨어서 마귀 결박을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항상 거하야 평강한 복을 받기를 원하오며 또한 다른 나라 사람들 같이 자유 활동과 좋은 사업을 많이 행하여 보기를 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때부터 상동청년회에 구연영ㆍ김진호ㆍ김창환ㆍ민영환ㆍ박용만ㆍ여준ㆍ우덕순ㆍ윤태훈ㆍ이관직ㆍ이동녕ㆍ이동위ㆍ이상설ㆍ이승만ㆍ이시영ㆍ이준ㆍ이필주ㆍ이회영ㆍ이희간ㆍ정순만ㆍ정재면ㆍ조성환ㆍ주시경최재학 등 민족운동사에 기록된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면서 크게 발전하여 그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전덕기 목사는 청년학원을 설립하는 등 민족과 나라를 위한 일꾼을 키워냈다. 상동교회에는 이미 남ㆍ여 공옥학교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이것들이 초등 교육기관이라 청년층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상동교회 안에다 교육 공간을 마련하고 학문을 통한 빈곤 추방과 국세 회복을 취지로 "상동청년학원"이란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고 1904년 10월 15일 개교식을 가졌다. 상동청년학원의 초대 교장 이승만은 청년학원의 설립 목적이 "하나님 공경하는 참 도로써 근본을 삼아 청년으로 말하여도 벼슬이나 월급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에 참 유익한 일꾼이 되기를 작정하자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이후 상동청년학원은 많은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수리학잡지"와 "가정잡지"란 이름의 월간지도 발간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1905년에는 그 활동을 해외에까지 확대하였다. 한국에서 멕시코 유카탄에 이주한 교포들이 처음 계약과는 달리 나쁜 환경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전덕기는 각 교회 청년회를 소집하여 논의하고, 이를 신문에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그 참상을 알렸다. 동시에 정부에 공개 서한을 보내 그 대책을 촉구하였다. 계속해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의연금을 모금했다. 그리고 조사단을 멕시코 현지로 보내 진상을 파악하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전덕기 목사는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에도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5년 11월 1주일 동안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구국 기도회도 주도하였다. 이 기도회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의 교인들은 "한국을 구원하사 전국 인민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다 천국백성이 되어 나라이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를 받아 지구상에 독립국이 확실케 하여 주심을 예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소극적인 방법만로는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을사조약 무효 상소를 올리는 것이었다. 회원들은 죽음을 각오하여 도끼를 메고 대한문으로 나갔다.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해산당함으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상소는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상동청년회의 나라를 위하는 정신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더욱이 전덕기와 정순만은 평안도 교인들과 더불어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민족운동에는 상동청년회 회원들만이 아닌 지방의 청년들도 합세했는데, 김구는 이것을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윗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참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히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것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또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에 이준 이상설 등 세 사람의 특사를 파견하는 데서도 전덕기 목사는 주도적으로 역할하였다. 그는 고종에게 친서를 받아 이준에게 전달하여 상동교회가 "헤이그밀사사건의 온상"이 되게 했다. 그리고 1907년 4월 창립된 신민회도 상동교회 출신들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부패한 구시대의 사상과 관습을 타파하여 "유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야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1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는 일제가 꾸민 105인사건으로 와해된 신민회의 남아 있는 조직을 끝까지 추스르며 자칫하면 끊어질 뻔한 민족운동의 맥을 이었다. 그러나 1912년 이후에는 지병이 악화되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2년 동안 고생하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1914년 3월 23일 별세했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주여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가노라"는 말이었다. 장례식에는 특히 하층 민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한다. 그의 주검은 경기도 고양 땅에 묻혔다가 1934년 일제의 강요로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로 인해 그의 위패만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그에 대한 추모사업은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지 8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곧 공옥학교 동창회에서 전덕기 목사가 민족에게 베푼 덕과 역사에 남긴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모사업을 전개하여 그 결실로 1922년 6월 5일 공옥학교 교정에 "목양에 충성을 다하시고 교육에 태두되시고 종교에 동량이신"(牧羊盡忠 敎育泰斗 宗敎棟梁) "고 목사전공덕기 기념비\"를 건립한 것이다.
-논문:"맛당히 울 일", 〈신학월보〉, 1904. 10;"술의 해됨", 〈가뎡잡지〉, 1906. 7;"놀고 먹는 사람", 〈가뎡잡지〉, 1906. 8;"외간 화목 일, 〈가뎡잡지〉, 1906. 8;"쇽긔를 해셕", 〈가뎡잡지〉, 1906. 10;"법률은 치안의 기관", 〈황성신문〉, 1907. 3. 22.
-저서:《日日의 力》(역), 1912.
-참고문헌:송길섭, 《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역사편찬위원회, 1979;윤춘병, 《전덕기 목사와 민족운동》, 한국감리교출판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