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장정심(張貞心, 1898. 9. 9~1947)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장효경으로 개성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감리교인 중 한 사람이다. 개성에 감리교가 들어간 것은 1897년의 일로 그 해 2월에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C.F. Reid)와 윤치호(尹致昊)가 개성을 방문하여 윤치호의 이모부 되는 이건혁의 지원을 받아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남감리교 선교사 콜리어(C.T. Collyer, 高永福) 부부가 개성에 내려왔고 이듬해(1898) 5월에는 산지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1899년에는 다시 하디(R.A. Hardie, 河鯉泳)가 개성에 내려와 병원사업을 시작했고 그 해에 개성남부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교인들의 자녀교육을 위해 학교도 설립되었는데 1904년에 여학교로 호수돈(好壽敦)이, 1906년에 남학교로 한영서원(韓英書院, 후의 松都學校)이 각각 설립되었다.
이 같은 개성의 초기 선교역사에 장효경은 최초의 개성 교인으로 교회 설립과 전도에 큰 공을 남겼다. 장정심이 태어난 1898년은 개성 선교가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장정심은 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려서부터 신앙과 신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가정의 신앙적 분위기는 나중에 쓴 그의 시 \"어머님의 기도\" 속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그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호수돈여학교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15년에 호수돈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고 바로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졸업하였다(제3회). 졸업한 후에는 고향의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호수돈유치원은 1917년에 시작된 것으로 매년 2백~3백 명이 유치원 교육을 받았다.
호수돈유치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을 겪었다.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여성들의 운동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애국부인회ㆍ향촌회ㆍ송죽회와 같은 비밀 항일운동단체도 있었지만 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을 이용한 공개적인 여성단체 조직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기독교 여성단체 조직과 활동도 이 무렵부터 활성화되었는데, 장정심은 20대 후반의 나이로 이러한 여성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개성감리교회의 청년회 조직인 엡윗청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동아일보〉에 의하면 1920년 6월에 엡윗청년회가 개최한 강연회에 6, 7백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장정심이 \"우리의 앗김\"이라는 연제로 열렬한 강연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동아일보〉, 1920. 6. 16, 3쪽). 장정심은 엡윗청년회뿐 아니라 개성여자교육회 활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강사와 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대 중반 그는 서울의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7년 2월, 〈청년〉(靑年)지에 \"기도실\" 및 \"병상\"이란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시는 한국 전통 시조의 운율을 살리면서 내용은 기독교의 순수신앙을 담고 있다. 조선의 틀에 기독교 신앙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학교 재학 시절 그는 활발한 시작(詩作) 활동을 보였다. 〈청년〉이 주된 발표무대였다. 1929년 3월 협성여자신학교를 제3회로 졸업한 후에도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학활동에 전념했다. 감리교 여선교회 일을 돕기는 했으나 시인으로서 활동을 주로 하였다.
1933년에는 그 동안 쓴 시들을 묶어 \"주의 승리\"란 시집을 발행했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신앙시로 가득 차 있다. \"一九三三년 十二월 二十五일 구주성탄을 맞이하면서 보잘것없는 선물이나 주님께 드리나이다\"라는 헌사에서부터 그의 신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집에는 2백 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중 90편은 성경을 읽으며 느낀 단상을 시로 승화시킨 것들이며 나머지 1백 10편도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신(神)과의 만남, 그로부터 얻는 기쁨과 은혜를 노래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종교적 체험이 그대로 시로 표현되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는데 \"성모 마리아\"에 대한 짙은 동경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순수한 신앙체험을 시로 표현한 장정심의 가슴속엔 언제나 강렬한 \"님\"에 대한 사랑이 짙게 깔려 있었다.
종교적 구도의 대상이었던 \"님\"이 1934년에 출판된 두 번째 시집, 《금선》에서는 잃어버린 조국으로 바뀌게 된다. 두 번째 시집에는 빼앗긴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 조국 강토의 회복을 기리는 강렬한 희망이 담긴 시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참다 못해 잊어볼까 하여도 잊어는 안지고 못잊어 괴롭습니다\"(\"임의 정\"에서). 이것은 빼앗긴 조국, 이 나라를 향한 그의 고백이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조국에 대한 신앙이 그가 남긴 시집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의 자손\", 개성 사람답게 그는 빼앗긴 조국의 한(恨)을 노래하였다. 이와 함께 조국 광복의 염원도 노래하였다.
1930년대 암울했던 시대에 순수한 신앙체험을 맑은 시심에 담아 조선의 전형적 시조 운율에 실어 노래했던 장정심의 시는 기독교계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도 널리 읽혀졌다. 그의 시는 〈청년〉뿐 아니라 〈신생〉, 〈신가정〉, 〈조선문단〉, 〈여성〉 등의 지면을 통해 널리 소개되었다. 그는 문인일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의식도 갖춘 인물로 시를 통해 한국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 일제 말기에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제4대 총무가 되어 금주금연운동으로 불리기도 하는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역사의 아픔을 노래하기도 했으며 1934년에는 《조선기독교 50년사화》를 편찬해냈다. 무엇보다 여성선교의 시각에서 한국 기독교 역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다.
신사참배문제로 교계가 시끄럽던 1938년, 그는 다른 문인들과 함께 일경에 끌려가 위협과 공갈을 받아 마침내 신사참배 및 총후보국강조주간 행사 등 친일행각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평소에도 좋지 못했던 건강 때문에 강요된 친일행각에 동원되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 8.15해방 후 병으로 활발한 활약은 보이지 못하다가, 개성 자택에서 1947년에 조용히 별세하였다.
-저서:《주의 승리》, 한성도서주식회사, 1933;《금선》, 1934;《조선기독교 50년사화》,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