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장세환(張世煥, 1902. 9. 28~1991. 8. 14)


사업가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1932년 5월 부인 매영숙(梅英淑)과 함께 아현교회에 출석하기 시작, 그 해 12월 25일 엄재희 목사에게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1937년 4월 아현교회 엡윗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는 한편 엡윗청소년회 고문을 맡아 이들의 활동을 도왔으며, 매영숙은 1930년대 여선교회를 이끌었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청년ㆍ여성 교인들이 있었기에 1930년대 들어서도 미자립 수준으로 독립구역을 형성하지 못하고 목회자가 자주 바뀌던 아현교회가 안정적인 상황을 유지하며 예배당 건축을 이룩하고, 1938년에 이르러 재정적 자립을 이룩하고 독립구역이 될 수 있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평신도 대표로 연회에 참석하면서 \"중앙 정치\" 흐름을 파악한 그는 해방 이후 아현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가 되었고, 1945년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 과정에서 수습대책위원회 책임자ㆍ복흥파 총리원 이사ㆍ사회국 위원ㆍ서무국 서기ㆍ회계 등을 맡아보면서 복흥파의 핵심 인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재건파와 복흥파의 통합 작업에도 깊이 참여하였는데, 1949년 2월부터 복흥 측 \"7인 대표\"로 통일전권위원회에 참여하여 서기로 활동하면서 통합의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하였고, 1949년 4월 29일~5월 1일 열린 합동총회에서 총리원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총리원 서무위원장이 되어 통합 이후에도 교단살림을 맡아 하였다.

한편 해방 직전 50명 수준으로 떨어졌던 북아현교회(1948년 당회에서 교명 변경) 교인 수는 해방 직후 장년만 2백 명 수준으로 증가하였고, 1950년 초 늘어나는 교인들을 위해 류형기 목사, 장세환 장로, 강수산 권사가 장의자 1개씩을 헌납했는데,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장의자 헌납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광나루로 피신하여 교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던 그는 9ㆍ28 서울수복 이후 북아현동으로 돌아왔다. 예배당은 남아 있었지만 사택 한 채가 폭격을 맞았고, 홀로 교회를 지키던 조상문 목사는 북으로 끌려간 상태였다.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긴 교인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한편, 서울로 돌아온 목사들을 초빙해 주일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1ㆍ4후퇴 이후 피난길에 오른 그는 곧바로 부산에 내려가 보수동의 2층짜리 적산 가옥을 세로 얻어 \"신양사\"(信陽社)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한편, 자기 가족 외에 박승호 전도사 가족을 비롯해 아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 서울에서 피난 온 다른 교회 교인들도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으니 이것이 1951년 2월 18일 창립된 보수동교회의 출발이다. 한편 그는 피난중에도 여전히 총리원 재단이사\"중앙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보수동교회와 총리원 살림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다.

1953년 말 서울로 올라온 그는 끊어진 한강 철교 복구 공사를 비롯하여 정부에서 발주하는 철도ㆍ도로 건설 공사의 상당 부분을 맡아 사업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본래 베풀기를 좋아했던 그들 부부는 사업으로 얻은 이익을 교회 개척과 목회 지원에 아낌없이 희사하였다. 그 예로 그들은 아직 사업이 번창하기 전이었고 전쟁 직후라 모두 자기 살기 바쁜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소유한 북아현동의 집을 교회에 헌납하였고, 이 집을 북아현교회 지교회로 사용하기로 결정, \"북성교회\"라 명명하여 1954년 2월 7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다.

1954년 3월 총회 이후 감리교회는 2차 분열을 겪게 되는데, 이때 그는 개인적으로는 호헌파로 나간 엄재희 목사나 김응태 목사와 가까운 사이였으나, 총회에서는 \"선교비 유용\" 혐의로 곤경에 처한 류형기 감독을 변호하는 등 총리원 입장을 적극 옹호하였으며, 이후에도 총리원 이사를 맡아 총리원 측을 대표하는 평신도로 활동하였다. 또한 1959년 2월 양측에서 교회 재합동을 위한 \"통일전권위원\"을 낼 때 총리원 측 5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통합 선언문 작성과 그 절차를 논의하였다. 또다시 교회 분열과 합동에 공헌(?)한 셈이다.

한편 감리교회 분열 당시 중립적 입장을 취했던 북아현교회 김성렬 목사는 양자택일을 요구받자 조용히 떠나려 하였으나, 교인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 3백여 명의 교인을 이끌고 나와 1956년 4월 22일 오늘의 아현중앙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시각 북아현교회에 남은 교인들 1백여 명은 담임자 없이 장세환ㆍ강효원 장로, 이종환 권사를 중심으로 분열을 수습해 갔다. 전쟁 후 장년만 4백 명 수준으로 급증했던 북아현교회는 보다 넓은 예배당을 필요로 했던 차에 장세환 장로 등이 교섭하여 1954년 8월 미연합감리회 여선교부 소유의 땅 6백여 평을 확보하였다. 문제는 건축비였다. 교회 분열로 더욱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옛 예배당을 처분한 후 교인들이 형편껏 헌금하고 직접 땀흘려 1957년 말 새 예배당을 완성하고 다시 아현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58년 6월 1일 봉헌식과 함께 그의 아내 매영숙 등이 장로로 취임했다. 당시 담임자였던 한영선 목사는 〈감리회보〉에 \"……총공사비 3,900만 환이었는데 4분의 3 가량이 장세환 장로 단독으로 부담하셨다. 그의 부인 매영숙 장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현장에서 친히 공사를 감독하시었다……\"고 기고했다.

그들 부부는 이미 한국 교회에 자선사업으로 유명한 교인이었다. 그는 다른 교회의 어려움까지도 발벗고 나섰으며 특히 농촌 목회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부인 또한 자선사업가로서 개인적으로 애지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생활이 곤란한 교역자들을 돕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자유당 정권 시절 대한상공회의소 대의원을 역임했던 그는 1960년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서 무소속으로 민의원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고, 그 해 8월 30일 특별총회에서 시국과 관련해 총리원 이사 전원이 불신임을 받고 사임할 때 함께 물러났다.

1962년 그의 회갑을 기념해 남가좌동에 신흥교회(현 모래내교회)를 개척ㆍ봉헌하였고, 1963년 아현유치원 재건에 앞장섰으며, 교회교육 분야에서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10월 아현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부인과 함께 \"교회 출석 30년 이상\" 표창을 받았으며, 1975년 10월 창립 70주년을 맞아 \"교회 중흥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그는 1991년 8월 14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말년에 교회 건축 문제로 교회와 거리감을 두었지만 교회에서 그의 장례를 거행함으로 그와 아현교회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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