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장석영(張錫英, 1894. 8. 3∼1982)


감독. 호는 화천(華泉)

경기도 강화읍에서 부친 장형래(張亨來, 본명 根宗) 씨와 모친 박마르다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3월 최죽사(崔竹史)학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공부하였고, 1902년 9월 전학하여 강화 잠두교회 학당에서 초보적인 종교교육을 받으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 이후 1909년 데밍(Deming)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6년 3월 강화읍 보창고등소학교를 졸업한 후, 이동휘 교장의 주선으로 1907년 9월 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였고, 1911년 3월 졸업 후 밤에는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낮엔 종로YMCA 영어과(2년제)에서 동시에 학업했다. 1913년 3월 영어과를 졸업한 뒤, 보성전문 법률과는 중단하고 감리교신학교 영문신학과(2년제)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1915년 3월 충남 논산읍교회 청년지도 전도사로 초빙되어 약 3년 동안 열심으로 일하다가 1918년 봄,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교회와 자교교회 주일학교장 및 서울지방 종교교육사업을 관장하면서 감리교신학교에 적을 두고 계속 공부하였다. 또한 동 교수였던 피셔(Fisher) 선교사의 어학선생으로도 활약했다.

그 후 1926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고 그 해 9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스카릿대학에 입학했다. 다음해 2월 뉴욕 콜롬비아대학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고 1930년 B.S 학위를 받았다. 이어 동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1932년 3월 M.A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 후 1년간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 B.D 학위를 받았다.

1933년 3월 미감리교 뉴저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5월 연희전문학교 교수 겸 교목으로 취임, 10여 년 동안 봉직하였다. 일제 말기인 1942년 11월 조선총독부 학무부에 의해 불온사상의 선동자요, 배일교육의 지도자라는 낙인이 찍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그 해 12월부터 개성 중앙남부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다, 1945년 3월 강화 신문리교회에 부임하여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0월에 이르러 미군정장관 상임 최고고문 및 미소공동위원회 고문으로 취임하였고,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겸 사무총장을 지내는 한편, 연희대학교 교수로 복귀하여 1948년 9월까지 교수 및 신과대학장으로 봉직했다. 이어 1948년 1월부터 1949년 5월까지 분열된 감리교회의 재건파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이후 감리교신학교에서 종교철학 및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1950년 6월부터 2년간 대한기독교청년협의회 총무를 지냈고, 1951년 4월에는 북미YMCA 100주년 대회에 한국YMCA 대표로 참석하였다. 한편 1951년 10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스탁톤, 태평양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D.D) 학위를 받았다.

1953년 9월, 그의 청소년 시절 신앙생활 터전이었던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교회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교회를 복구ㆍ재건했고, 교인들의 영적 지도를 통해 교회의 부흥에도 큰 공로를 남겼다. 1955년 4월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겸 교목으로 재직했으며, 그밖에도 1956년 4월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1958년 2월 대한기독교교육협회장을 지냈다.

1960년 3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충남 예산읍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62년 2월에 한국기독교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63년 1월 연세대학교 재단이사 등에 선임되었다가 1967년 10월 은퇴했다.

그러나 은퇴 후 통일교가 주도하는 재단법인 기독교연합운동협회 총무직을 맡아 활동함으로 인해 세인의 지탄을 면치 못했다. 그는 본래 나름대로 각 교파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신학을 주장해 왔으나, 통일교와 영합함으로써 이단으로 지목되어 그의 귀중한 생애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82년 별세하였다.

그는 중학 졸업을 전후해서 탐독하던 전기 중, 특히 벤자민 프랭클린의 13덕에 깊은 관심을 두어 해방 이후 자신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지녀야 할 생활도덕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소개한 바 있다. 즉 \"사랑, 정의, 충직, 청렴과 결백, 절제, 예지, 민첩과 신속, 정확, 근로\"가 그것이다.

또한 그는 헤겔과 듀이에게 영향을 받아 다음의 세 가지 생활철학을 내정하고 일상생활에서 힘써 수행하였다. 첫째, 국가에 충성을 다한다(국가는 민족의 통합적인 도덕적 정신 또는 이념의 현실이다). 둘째, 천지 대기(大氣)에 조화(調和)한다(인간은 자연계의 산물로 육체를 가진 실재이기 때문에 자연법칙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영원한 창조적인 절대적 실재에 연결한다(인간은 정신적 존재로서 전체적인 창조자의 부분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본체인 절대적 존재에 친근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한편 그는 자신의 이상을 삼아 평생토록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다섯 가지 요항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민주윤리의 창도자, 2) 진보주의신학의 선험, 3) 기독교연합운동의 기수, 4) 숭고한 도덕적 정신혁명의 사도, 5) 새 세계 창조운동의 십자군.

-저서:《기독교윤리와 사회제도》, 1953;《민주주의와 신도덕》, 1954;《새 사람의 길》(역), 1957;《향상의 도》, 1958;《새 이상의 종교》, 1963;《창세기강해》, 1967;《종교철학》, 1967;《기독교연합운동의 진상(眞狀)과 문제점》, 1971;《승리의 비결》, 1976;《혁명의 복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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