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임진국(林鎭國, 1884. 7. 16~1966. 4. 24)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한학과 의학 등을 수학하였고, 1910년 7월 해주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후 일본에 유학, 교외생으로 와세다대학 문과를 수료하였다. 귀국 후 곧 목회에 뜻을 굳히고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13년 3월 졸업과 동시에 연안(延安)지방으로 파송받음으로 44년간에 걸친 목회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후 그는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5월 졸업하고 1919년 연회 정회원으로 허입되었다. 1915년 평북 백천읍교회로 전임하였고, 1919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21년 평남 신창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충남 강경(江景)교회에 전임하여 목회하다가 1926년 홍성구역 담임자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홍성읍교회를 위시하여 광활한 홍성구역에 산재한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보았고 큰 부흥과 발전을 이루었다.
1928년 가을, 공주교회에 부임하였으나 채 1년도 안 되어 1929년 7월, 경기도 이천지방 제4대 감리사로 파송받아 시무하였다. 계속하여 1934년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4회 중부연회에서 인천지방 감리사 겸 내리구역 담임으로 파송되었다. 얼마 뒤, 1884년 6월 24일 선교사 매클레이 박사가 인천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선교 50주년 기념행사\"가 1934년 6월 24일 내리교회에서 성대히 베풀어졌는데, 이때 장엄한 기행렬(旗行列)이 항도 인천을 수놓았다 한다. 남녀 교인이 모두 흰옷을 입고 손에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이라는 깃발을 들고, 내리 조선소년 척후대 나팔수와 고적대의 군악에 맞추어 온 인천 거리를 누비는 일대 축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행사는 서울과 평양에서도 동시에 거행되었다.
한편 같은 해에 내리교회는 큰 홍역을 치르고 결국 교회가 분열되는데 창영교회의 분립이 바로 그것이다(〈기독신보〉에 대서 특필됨). 담임목사인 그와 부목사인 김홍제(金弘濟) 사이의 불화가 분쟁의 도화선이 되어 불미한 추태를 수삼차 연출한 끝에 허영생, 장윤백, 장기진, 정흥운, 정춘식, 유원준 등 80여 명의 교인들이 분립하여 커스트럽(Kostrop, 高壽道) 선교사의 기념예배당 건립을 계기로 오늘의 창영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1885년 내리교회가 건립된 이래 50년 만에 교회가 부자연스럽게 분리되어 그 아픔은 깊고 쓰라렸지만 이렇게 하여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 분열을 겪은 내리교회는 곧 70여 명의 직원과 교우들이 활동하여 3백 명의 새신자 얻기를 목적하고 가족, 친구, 이웃을 인도하는 한편, 경성의 유력한 강사들을 청하여 2주간 계속 전도하고, 이어서 변홍규 박사와 강태희 목사를 청하여 일주일 부흥회를 개최한 결과 교인에게 은혜가 풍성하였고, 이때 새신자 박남칠 씨가 2천여 원 상당의 가옥과 대지를 교회에 봉헌해 영화학교 기본금을 조성하였으며, 교회당에 부족한 의자 3천좌를 구입하였다. 시련 속에서 맞은 커다란 변화와 은혜였다.
그 후 1939년 춘천읍교회로 파송되어 시무하다가, 1942년 3월 상동교회에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청년 신앙지도에 크게 힘썼는데,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일 밤 예배를 제외하고는 매일 밤 10명 정도의 청년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과 웨슬리의 생애와 사상을 가르쳤다. 이 당시 일제의 무서운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성탄절 새벽송과 성극은 계속되었으며 종각에 달아맨 \"축 성탄\"은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민족운동의 요람지로서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였다. 한편 태평양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쟁물자가 달리자 일제는 우리나라의 물자와 인력을 무자비하게 탈취했는데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상동교회는 전국에서 제일 큰 종이었던 교회 종과 김종우 목사 때 안석기 씨 부부가 헌납한 철문이 징발 대상이 되었는데, 철문은 쉽게 떼어갔지만, 높은 종탑 위의 종을 떼 내려면 당시 돈 8백 원이 소요되는 큰 공사를 해야 했기에 일본은 그 종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상동교회의 종이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는 1년 후인 1943년 광희문교회에 부임하였고, 이어 1946년 성동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성동교회는 교단 분규로 인해 교회도 분규되었는데, 임 목사는 이 분규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전력하여 차츰 상처가 아물며 부흥을 이루어갔다. 그 후 1947년 4월 고령과 과로로 쓰러진 홍순탁 목사의 후임으로 다시 상동교회에 부임하여 1년간 시무하다가, 1948년 4월 원주지방 감리사 겸 원주교회 담임으로 부임해 갔다. 그는 동년 6월 7일부터 5일간 강태희 목사를 강사로 부흥집회를 열어 54명의 새신자를 얻었을 뿐 아니라, 신자들도 큰 은혜를 받아 교회사업에 열심으로 봉사하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인 1949년 2월 16~24일 원주읍교회에서 신사훈 박사를 강사로 지방사경회를 열었는데 5, 6백 명씩 모였으며 지방개척전도비로 일금 10만 원이 거출되었다.
그는 1950년 3월 연회 때 목회직에서 물러났다가, 전쟁중 목사들이 많은 희생을 당한 관계로 1951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중부ㆍ동부ㆍ서부 연합연회 때 삼청교회로 파송받았다. 그 후 1953년 3월 대전에서 개최된 중부ㆍ동부 연합연회에서 다시 삼청교회에 파송되었는데 그때 원동교회와 \"합구역\"으로 파송되었다. 그가 언제 삼청교회에 부임하여 예배를 시작하였는지는 그 시기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1952~1953년 어간에 그도 올라와 삼청교회와 원동교회에 남아 있던 교인들을 돌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교회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 방황하던 교인들과 일반 주민들에게 구호품을 배급하는 창구였다. 그의 삼청교회 목회도 그러한 치유와 위안의 목회였다. 한편 피난 갔다 돌아온 교인들, 월남한 교인들, 남쪽에서 올라온 교인들, 전쟁 후 새로 믿기 시작한 교인들 등 다양한 교인들이 출석하는 상황에서 그는 원리원칙을 고수하며 다양한 욕구를 조화시켜 나갔다. 부임 당시 그는 70세로 나이가 많아 활기 있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초지일관하는 뚝심이 있어, 삼청교회는 전쟁 후 혼돈기를 지나 1953년에 접어들어 급속한 회복 추세를 보였다.
이후 1954년 계동교회 담임목사로 봉직하였으며 1957년 목회일선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1965년까지 서울북부지방 종로구역 원로목사로 활동하다가 1966년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