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임영신(任永信, 1899. 11. 20~1977. 2. 17)
충청남도 금산 출신으로 아버지는 구환(九桓)이며, 어머니는 김경순(金敬順)이다. 기독교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며, 1909년 고향의 심광학교(心光學校), 1914~1918년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交)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전주 기전여학교로 부임해온 박현숙 선생이 신앙생활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가르치기 위해 만든 공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공주회(公主會, King Daughter\"s Circle)는 1909년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학당의 정기예배만 가지고는 신앙심을 북돋우는 데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치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 공주회는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도 만들어졌는데 1915년에는 영변의 숭덕여학교, 평양의 숭의여학교에서도 만들어졌다.
그는 전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히로시마기독여자전문학교(廣島基督女子專門學校)에서 공부하였으며, 1925~1931년 미국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대학원 등에서 공부하였는데 석사 학위 논문은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이었다. 1957년 미국의 남캘리포니아 주립대학과 1962년 롱아일랜드대학, 1971년 일본의 니혼대학(日本大學) 등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1918년 천안 양대학교(良岱學校), 1921~1922년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交)와 이화학당(梨花學堂) 교사로 지냈다. 1932년 4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사실 중앙보육학교는 그 기원이 1916년 중앙교회가 설립한 중앙유치원이다. 중앙유치원은 1918년 10월 11일에 독립된 보육기관으로 설립되었는데 중앙대학교는 바로 이날을 중앙대학교의 설립연대로 잡고 있다.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곳곳에 유치원이 설립됨에 따라서 유치원 보모 양성이 요망되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은 1922년 9월 유치사범과를 설치하고 어린이 보육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교수하기 시작했다. \"중앙유치원 사범양성소\"라고 명명한 이 학교는 유각경(兪珏卿)과 차사백(車士白)의 노력으로 설립되었으며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이상 학력의 소유자가 입학할 수 있었다. 수업연한은 2년이었으나 1924년 제1회 졸업생은 7명에 불과하였다. 1928년 9월에는 장두현, 박희도, 김상돈, 신태화 등의 노력으로 \"중앙보육학교\"로 승격,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교사를 정동 1의 8번지로 이전하였다. 당시 교장에 박희도가 취임하였다.
1932년 임영신이 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설립자 겸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1935년 5월 교사를 피어선성경학교로 다시 이전하였다. 1937년 임영신 교장이 도미하여 중앙보육학교 유지 발전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명수대에 8백여 평의 석조 3층 교사를 신축하였다. 1938년에는 임영신 교장이 파이퍼(Annie M. Pfeifer)에게서 30만 달러를 희사받고 중앙보육학교 유지재단인 \"A.M. 파이퍼 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파이퍼 여사, 부이사장에 임영신 교장이 취임하였다.
그 후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고 휴교하였으며 졸업생 40명을 단축 졸업시키고 철도학교에 교사를 대여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아 다시 개교하였으며 \"중앙여자전문학교\"로 승격하였다. 당시 교장에 임영신이 취임하였으며 1946년 7월에는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중앙여자전문학교\" 정식인가를 받고 학생을 모집하였다.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인해 무기휴교에 들어갔으며 1951년에는 부산시 송도에서 중앙대학 단독으로 개강하였으며, 1953년 2월에는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총장에 임영신이 취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부산 피난 교사는 서울 본교로 복귀하였다. 1960년 4.19의거에는 3천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6명이 순국하였다.
중앙대학교의 뒤에는 자식을 장성한 한 사회인으로 키우듯 중앙보육학교를 지금의 중앙대학교로 키운 어머니 임영신이 있었던 것이다.
임영신은 교육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65~1973년 교육연합회 회장, 1966년에는 세계교직자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3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총무를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으며, 1946년 9월 민의원을 지냈다. 1948년 8월 상공부 장관이 되었으나, 1949년 민의원보궐선거 때의 독직사건(瀆職事件)으로 기소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1949년 6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에는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0년 2월 상공일보사(商工日報社) 사장, 1952년 여성계사(女性界社) 사장 등 언론계에도 관여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고문, 1963~1971년 대한부인회 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회장이 되었다. 1971년 민주공화당 고문, 1972~ 1976년 국민회의 대의원과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그녀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과 미국 아이젠하워상,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