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임영빈(任英彬, 1900. 2. 15~1990. 3. 3)


소설가. 호는 석계(石溪). 별명은 춘풍(春風)

황해도 금천군 마장굴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수년간 송도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6년 미국에 건너가 밴더빌트대학에서 수학하다가 남감리교대학(SMU)으로 옮겨 \"비교문학\"을 공부하였고, 1930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2년 동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태원교회(1934~1937)ㆍ홍제원교회(1937~1939)에서 목회하는 한편, 총리원 교육국 간사(1935~1940)로 일하면서 〈감리회보〉를 주필하였다. 이후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 간사(1940~1942)ㆍ감리교신학교 교수(1942~1945)ㆍ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1946~1947)ㆍ대한기독교교육협회 총무(1947~1949)ㆍ대한성서공회 총무(1949~1966)를 역임하였으며, 1946년 이후 1966년 은퇴할 때까지 아현교회 소속으로 파송되었다. 만년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다가 1990년 3월 3일 뉴욕에서 별세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난륜\"(亂倫)으로 데뷔한 이래 해방 전까지 1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기고 15년간 침묵을 지키다가 1956년에 이르러 두세 편의 단편소설을 쓴 뒤, 최초의 단편집 《난륜》(1960)을 내고는 창작에서 손을 떼었다. \"난륜\", \"공상에 사는 자\", \"서문학자\"(序文學者), \"복어 알\", \"어떤 구직자의 기도\", \"친구 대접\", \"목사의 죽음\", \"준광인전\"(準狂人傳), \"민씨와 토요 오후\", \"사랑의 위험\", \"어느 성탄제\", \"오장로\", \"계시\" 등 모두 13편이 실려 있다.

이 외에도 〈신학세계〉, 〈조선감리회보〉, 〈기독교사상〉 등에 많은 글들을 기고했는데, 특히 1935년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1934)을 돌아보며 \"개척자들이여\"라는 시를 발표하였고, 1949년 북아현교회 김유순 목사가 통합총회에서 감독으로 당선되자 그때 감격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기도 했다.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되풀이하는 일을 고만두고 버더나가는 일을 하자. …… 우리는 따지러 들지 말자. 따지러 들면 다 죄악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따지는 것은 고만두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넓히는 데 힘을 쓰자. …… 주님 명령만 나리소서. 그러면 많음이 하나 되고 하나가 많음 되어 나아가리다.\"

한편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서울에 남아 있던 그는 억지로 기독교민주동맹에 가입하였고, 이내 7월 10일 오후 2시 종로 기독교청년회관 강당에서 개최된 \"인민군환영대회\"의 환영사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행사를 앞두고 준비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는 짧아도 너무 짧은 환영사를 써왔다. 원고지 한 장에, 그것도 몇 줄 안 되는 환영사를 적어온 것이다. 그 환영사를 읽는다면 차라리 안 읽느니만 못한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 더 살을 붙이라는 부탁을 끝내 거절했고, 결국 심명섭 목사가 그 초안을 장황하게 늘려 썼다고 한다.

그는 창작집 《난륜》 서문에 자신의 창작태도 세 가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 진실. 무엇이든지 관찰하고 기록할 때는 진실해야 한다. 속임이나 과장이 없다. 거짓을 묘사할 때에도 진실하여야 한다. 거짓을 거짓되게 묘사하면 그것은 쓸데없다. 둘째, 개성. 아침때, 점심때, 저녁때, 밤에, 비 올 때, 눈 올 때, 흐릴 때, 맑을 때 날씨가 다 다르다. 이 개성을 잡아 묘사하는 것, 이것은 관찰과 공부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 생명. 개성을 진실되이 잡아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이 죽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진은 생명이 적다. 그림은 개성을 잡아 진실되이 표현하는데 생명까지 넣어 표현한다. 그는 이런 창작태도가 자신의 생활태도이기도 함을 밝히면서, \"우리 생활 전반에 있어서도 이 세 가지 표준, 즉 진실되고 개성있고 생명있게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행하기도 한다면 얼마나 훌륭할까?\"라고 묻는다.

또한 그는 표현법에 있어서 \"제1 달의(達意), 제2 수식(修飾)\"임을 강조한다.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 재미있고 인상 깊게 하려고 수식하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창작태도와 작품의 실제는 동떨어져 있다. 즉 사실주의적 창작태도를 중시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추상적 묘사ㆍ평면적 구성, 과다한 사설과 부연ㆍ과장과 풍자 등이 많다. 가령 \"천당을 전당잡힐 터이니 직장을 구해 달라\"는 \"어떤 구직자의 기도\", 학자인 척하면서도 1년이 넘도록 저서의 서문 한 장 못쓰는 \"서문학자\", 안수기도로 온갖 병을 고치던 부흥목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는 \"목사의 죽음\", 후기에 쓴 \"계시\" 등에서 대개 인간의 속물근성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데뷔작인 \"난륜\"만이 비교적 사실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끝으로 그는 서문을 마치며 \"근년에 와서는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상주의의 작품을 써볼까 하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해방 이후 쓴 \"오장로\"(1956), \"계시\"(1956) 등 기독교인의 바른 신앙자세를 환기시키는 윤리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작품 \"계시\"에는 세 가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첫째, 교장인 선교사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는 교감. 둘째, 교감의 비열함을 야유했다가 면직된 유 선생의 구명운동이 실패하자 신학 지망을 포기한 고덕명. 셋째, 기성교회의 권위와 성경의 절대성을 믿는 조중철 목사, 그는 차 마시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건파다. 고덕명은 조 목사를 만나, \"교회의 최고 권위자\"인 김 목사에게 예수가 나타나 들려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예수가 \"너는 내 양을 먹인다고 하면서 내 양을 빌어먹게 하고 있고나! …… 너는 네 교권을 옹호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마귀의 힘이라도 빌게 되면 비누나……\"라고 힐난하자, 김 목사는 \"교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봉하여 둘 필요가 있고, 교권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우리편에만 좋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교권이 서게 되면, 당신도 서게 되고……\" 하며 반박한다. 이런 풍유적인 이야기를 들은 조 목사는 거기에 반진리(半眞理)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한국 교회의 상업주의와 권위주의를 풍자하는 작품이다.

-저서:《난륜》,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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