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흥렬(李興烈, 1909. 7. 17~1980. 11. 17)


작곡가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전도부인 생활을 했고, 이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깊은 신앙심을 키웠다.

원산 광명학교 재학 당시 그는 음악에 특출한 소질을 보여 교회의 성가대나 오르간 연주에 참여했고 남다른 감상능력도 보였다. 졸업 이후 어려운 가정형편을 무릅쓰고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후 그는 일본 도쿄음악대학(東京音樂大學)에 입학, 고학으로 공부하며 피아노를 전공하였고 1931년 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재학 당시 그가 학교에서의 피아노 연습시간이 부족하여 고민하자 이 소식을 접한 고향의 어머니가 어려운 가운데 보낸 피아노 구입비를 받고 크게 감격한 일화로 유명하다.

귀국 이후 그는 모교인 원산 광명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작곡에 뜻을 두어 여러 시인의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이기 시작했다. 1934년 마침내 그의 처녀작품집 《이흥렬작곡집》이 출판되었는데, 창작이 거의 전무했던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일이었다. 이즈음 서울의 경성보육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음악을 지도하는 한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교회 성가대들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그가 언제부터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무렵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6년 홍난파와 함께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였고, 1937년에는 동요집 《꽃동산》을 출판하는 한편 경성피아노 3중주단을 조직했으며, 1938년에는 아폴로합창단을 조직하였다. 또한 1939년 3월부터 경성방송국이 가곡을 보급하기 시작하면서 《가정가요 제1집》을 발간하고 방송을 통해 지도했는데 여기에 그의 가곡 \"어머니의 마음\"이 담겼으며, 그 해 6월 창작운동을 독려하는 뜻에서 동아일보사가 개최한 창작발표회에 이미 발표된 바 있는 그의 가곡 \"바위고개\", \"봄이 오면\", \"자장가\" 등이 다시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배재중학교와 풍문여자중ㆍ고등학교 음악교사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경성음악대 강사, 이화여대 강사, 고려대 강사 등을 지냈고 서라벌예술학교 음악부장도 역임했다. 1945년에는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광복 직후 좌익계열에서 조직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전국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2백여 문필가들이 회합하여 그 해 3월 13일 출범한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의 음악분과위원장을 맡는 한편, \"대한교육음악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한국작곡가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고, 1957년부터(~1980)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63년부터는 숙명여대 음악대 교수로 또는 음악대 학장으로 1974년 정년퇴임 시까지 재직했다. 한국음악협회 고문(1965)과 한국방송가요심의위원장(1967), 한국작곡가협회장(1969)을 역임하였으며, 1972년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밖에도 대한민국문화상(1959)ㆍ한국방송문화상(1959)ㆍ서울시문화상(1961)ㆍ대통령문화훈장(1963)ㆍ고마우신 선생님상(1967)ㆍ예술원상(1967) 등을 수상했으며, 작품집으로 《너를 위하여》(1965, 제2작곡집),《가서 나 살고 싶은 곳》(제3작곡집) 등을 출판했으며, 음악이론서로 《음악의 종합연구》(1958), 《새로운 음악통론》(1962)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바위고개\", \"봄이 오면\", \"어머니의 마음\", \"꽃구름 속에\", \"코스모스를 노래함\", \"고향 그리워\" 등 널리 애창되는 정겨운 가곡이 무수하며,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으로 시작되는 군가 및 교가, 응원가 등 무려 4백여 곡의 노래를 지었다.

그는 한국 교회음악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1980년 11월 17일 별세하였다.

고 임호선(林鎬善) 여사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고, 장남 영철은 서울여대 인문과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차남 영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특히 선친을 이어 작곡가로 활동하는 영조는 부친의 추모음악회를 열어왔으며, 손주 철주(미 템플대 대학원에서 작곡 전공)와 함께 3대째 작곡가업을 잇고 있다.

한편 최근 북제주군은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으로 시작하는 자장가 \"섬 집 아이\"(한인현 시, 이흥렬 곡)의 노래비를 성산 일출봉과 우도를 배경으로 한 구좌읍 종달리 해안에 세우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집니다(3절).\" 1934년 출간된 《이흥렬 작곡집》에 실린 \"바위고개\"(이흥렬 작사, 작곡)는 지금까지도 애창되고 있다. 단순한 머슴살이의 애환을 노래했다기보다 일제하 민족혼이 내면에 스며 있는 이 곡은, 애틋한 선율이 서러웠던 옛 시절을 떠올려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는 생전에 \"님\"이 일제 치하 조국을 표상한 말이었다고 술회했다.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양주동의 시에 곡을 붙인 \"어머니의 마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홀로 그를 키운 어머님을 생각하며 지은 노래로 부를 때마다, 들을 때마다 깊은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추위와 주림에 시달리어 한겨우내 움치고 떨며 살아온 사람들 서러운 얘기 서러운 얘기 아아 까맣게 잊고 꽃향에 꽃향에 취하여 아득하니 꽃구름속에 쓰러지게 하여라~.\" 1965년 출판된 그의 제2가곡집에 들어 있는 \"꽃구름 속에\"(박두진 시, 이흥렬 곡)는 3부 형식의 가곡이다. 율동적이고 경쾌한 곡으로 화사한 봄바람의 송가 속에 어린 한줄기 애절함이 호소력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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