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효덕(李孝德, 1895. 1. 24~1978. 9. 15)
평남 용강에서 평범한 농부였던 이인수와 박성일 사이에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남. 다섯 살 무렵 부모가 예수를 믿게 되어 온 가족이 30리나 떨어져 있는 예배당에 나가게 되었다.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이효덕의 집안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지만 이효덕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완고한 지역인 고향에서 가장 먼저 예수를 믿었던 이효덕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특히 막내딸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던 어머니는 이효덕의 나이 7세부터 교회 목사에게 맡기기도 하고, 8세에는 진남포에 유학을 시키면서 여러 방면으로 공부시킬 방법을 찾았다.
사경회 이후 이효덕은 광혜병원 전도사 집에 맡겨졌고, 정진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소학교 시절 그는 \"나는 시집 안 가고 전도부인 한다\"고 결심했고, 평생 그 결심을 놓치지 않았다. 정진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입학 후 그의 셋째 오빠가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만주로 망명하게 되어 집안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수예를 놓고 바느질을 하며 공부하여 1911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 삼화읍교회에 초청을 받아 교사와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고, 1912년 모교인 숭의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1학년 학생들의 이과(理科)를 담당했던 이효덕은 담당과목을 가르치는 데도 열심이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생들에게 삼천리 강산의 지도를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다.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던 이효덕은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황애덕, 군수집 며느리로 권세 있는 집안 출신 교인이었던 안정석, 숭의 출신으로 평양 숭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있던 김경희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숭의여학교 교사였던 이효덕은 황애덕과 함께 1913년경 숭의여학교 상급반 학생들로 \"송(松)형제회\"를 먼저 조직하였고, 이들의 추천에 의해 (주로 하급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별도로 \"죽(竹)형제회\"를 조직하였다. 이 둘을 합해 \"송죽형제회\"라 부르게 되었고 이들은 \"생일잔치\"로 위장하고 매달 15일을 기해 1회 모임을 가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원 수도 증가하게 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을 하여 그곳의 지시에 따라 진행시켜야 할 국내활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돕기 위한 독립기금을 모으는 데 그들의 행동목표를 맞추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효덕은 숭의여학교에서 2년간을 복직하고, 황해도 신기읍의 소학교, 평남 강서군의 사달소학교를 거쳐 중화 곤양 장거리 양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3.1운동을 맞이하였다. 3.1운동은 이효덕의 삶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오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양무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이효덕은 3월 3일 경찰에 호송되어, 1920년 4월 출옥하기까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 그의 일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쓰러져 병상에 눕고 말았다. 중병을 얻어 절망감에 빠져 있던 이효덕은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만약 내게 다시 살 기회를 주신다면 10살 때 결심하고 약속한 대로 성경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전도부인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목숨을 바치는 전도자가 되겠습니다. ……\"
병에서 완쾌된 이효덕은 서울 협성여자신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태화사회관 성경학원의 교사(1925~1928),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와 전주YWCA 활동에 참여하였다(1928~1929).
절제운동은 3.1운동 이후 1920~30년대 식민지 상황 속에서 일본식 타락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을 갖고 추진된 운동이었다. 우리나라의 절제운동은 1923년 5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파송된 틴링(C.I. Tinling)이 내한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절제운동 강연을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으며, 결국 1924년 8월 28일 한국인들로만 조직된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가 이화학당에서 창립되었고, 손메례가 초대 총무로 취임하였다. 6년 동안 여자절제회운동을 지속했던 손메례는 1929년 현장에서 은퇴하였고, 이효덕이 그 후임으로 1929년부터 1937년까지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당시 절제회운동으로 금주ㆍ금연운동을 실시하였는데, 각 교회마다 절제회를 조직하여 금주서약, 금연서약을 받기도 하고 연합회에서는 각 지방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며 도시에서는 선전행진을 계획하여 악대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계몽 삐라, 포스터 등을 만들어 각 곳에 살포하거나 붙이고 금주가를 만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급하며 부르게 하였다. 절제회운동으로 또한 물산장려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 운동은 우리 손으로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그 물건을 아껴 쓰고 애용하자는 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채색 옷 입기인데, 이효덕은 명주생산 장려운동을 벌이고 명주를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하여 스스로 입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입기를 권하였다. 이효덕은 절제회 총무로서 전국 곳곳으로 순회강연을 다녔는데 산간벽지를 걸어다니며 강연을 하기도 하고 멀리 만주지방까지 순회강연을 하였다. 어떤 때는 강연 중 \"삼천리 반도\"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하고 집회가 중단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효덕의 노력으로 교회마다 앞다투어 절제회를 조직하고 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청년ㆍ소녀절제회도 조직되어 청소년들에게도 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효덕은 건강상의 문제와 1936년 후반 6개월간의 강연 중지처분을 받아 사무를 중단하고 있다가 1937년 절제회 총무직을 정식으로 사임하였다.
절제회 총무직 사임 이후 이효덕은 수표교교회(1938~1942)와 동대문교회 전도사(1943~1956)로 시무하였고, 그에 의해 화양교회와 청량교회가 시작되었다(1952). 1956년부터 1966년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연합회 부녀국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감리교 안식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78년 83세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홍우준, 《평창의 별 리효덕 전도사》, 한국기독교문화원,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