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회영(李會榮, 1867. 3. 17~1932. 11. 20)
서울 저동(苧洞)에서 형조판서를 지낸 부친 이유승(李裕承)과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 동래정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가정 분위기나 사회적 환경으로 볼 때 당연히 관계에 투신할 입장이었지만 벼슬길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어려서부터 자유와 평등, 인권사상과 함께 몸소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집안의 노비들을 풀어주기도 했고, 남의 집 노비들에게는 존댓말을 쓰기도 했으며, 적자와 서자의 차별을 폐하고, 부인들의 재가나 재혼을 장려했다. 특히 과부로 있던 누이동생을 거짓 장사 지낸 후 재가시킨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며, 그 자신도 나중에 상처(喪妻)한 후 젊은 과부를 정식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1896년부터 항일의병과 신교육 보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도 개성 인근 풍덕지방에 인삼밭을 일구었는데 6년 동안을 잘 키워 수확기를 앞둔 1902년 가을, 도둑을 맞았다. 개성경무청 고문이었던 이 도둑은 경찰로 하여금 무허가 재배를 구실로 되레 이회영을 처벌하도록 꾸몄다. 이에 격한 그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창문을 부수며 경찰관을 엄히 꾸짖었는데, 이로 인해 4일간 강제구금 당했다. 이후 문중의 항의로 법적 투쟁을 한 결과 사실이 밝혀져 이회영은 얼마간의 보상을 받고 곤욕을 씻었다. 이 일이 고종에게 알려져 격찬을 받고 즉시 탁지부 주사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비밀리에 진행될 때, 그는 장유순ㆍ이상설ㆍ이시영ㆍ민영환ㆍ이상재ㆍ김진호 등과 함께 저지하려다 역부족으로 실패하였고, 이후 가재를 팔아 자금을 마련해 나인영\"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 5적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
1906년 초여름, 이동녕ㆍ이상설ㆍ장유순ㆍ여준 등과 의논하여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 첫 단계로 만주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2세 교육에 힘썼다. 이후 국내활동의 책임자로 자청, 귀환한 그는 교육운동에 적극 참여, 기호ㆍ서북ㆍ호남ㆍ교남ㆍ관동학회 지사들과 연락하여 평양 대성학교ㆍ정주 오산학교ㆍ안동 협동학교ㆍ서울 상동청년학원 등에 동지들을 추천ㆍ파견하였고, 당시 상동교회 권사였던 자신은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1907년 4월경 전덕기ㆍ양기탁ㆍ이동녕ㆍ안창호ㆍ이갑ㆍ유동열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안창호ㆍ이동녕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으로 독립운동에 전력하였다.
한편 네덜란드의 수도인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양기탁에게 전해들은 그는 전덕기 등과 협의,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릴 것을 결의하고, 그가 잘 알고 지내던 내시 안호영을 통해 고종에게 이 뜻을 전달했으며, 당시 만주 용정에 있던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 검사 이준, 러시아공사관 서기 이위종을 특사로 추천하였다. 이처럼 헤이그특사사건의 중요한 막후역할을 하였다.
1909년 봄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항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제2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을 논의, 그를 비롯해 이동녕ㆍ주진수ㆍ장유순 등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그 해 10월 안중근의 이토 사살 이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해외와 국내로 나뉘어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한일합방 이후인 1910년 겨울, 이상룡ㆍ장유순ㆍ이관직ㆍ김창환ㆍ여준 등과 더불어 그는 6형제의 전 가족 40여 명을 이끌고 만주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망명하였다. 한편 갑자기 한인들이 몰려들자 현지 중국인들은 의혹을 품고 가옥ㆍ토지의 매매와 임대차, 심지어 생필품 거래까지 거부하였다. 그는 이듬해 북경 원세개 총통을 찾아가 한인 이주 동기와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해 줄 것을 부탁, 한인들의 사업에 협력하라는 친서를 얻어냈다. 1911년 4월,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항일독립단체이자 교포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그 부속기관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가 곧 이석영(그의 둘째 형)의 사재를 털어 100여 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에 부지를 매입하고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1913년 연이은 흉작과 관헌들의 훼방으로 청년 학생들이 본국 또는 노령으로 흩어지게 되어 경학사는 해산하였고, 이후 그는 국내 정세를 살피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여 6년간 활동하였는데, 1915년 일경에 일시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3.1운동 직전 이승훈ㆍ오세창 등과 고종 황제의 중국 망명계획을 세우고 고종도 이를 승낙하였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9년 2월 북경으로 갔다가 곧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일단 가담했으나, 방법론적 견해 차이로 그 해 5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후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미국에서 이승만과 반목하던 박용만(朴容萬), 무정부주의에 심취되어 있던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형제, 러시아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조소앙(趙素昻), 그밖에 신채호, 김창숙(金昌淑), 중국인 노신(魯迅) 등과 여러 다른 사상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며 점점 무정부주의와 그 행동노선에 마음이 끌려갔다.
1923년 중국 호남성 한수현에 한중합작 이상농촌 \"양도촌\" 건설에 힘썼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으며, 1925년에는 북경에서 소문난 간첩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한 일로 곤욕을 치르고 천진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그는 일생 중 가장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렸다.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에 \"한국의 독립운동과 반공산주의 자유연합운동\"이란 논문을 발표, 이를 결의안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과 일본의 독립지사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그 해 10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 그가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격렬한 무력항일투쟁을 벌여나갔다.
1932년 2월 상해사변이 일어나고 사태가 긴박해지자 중국국민당 간부들이 만주에서 공동항일전선을 전개하자고 제의해 왔다. 즉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지하조직을 만들어 만주 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암살 계획이 확립되면 자금과 무기는 중국이 제공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 거사의 지휘를 맡은 그는 그 해 11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주로 향했고, 대련항에서 밀정에 의해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66세의 노구에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고 결국 혀가 잘리고 온몸이 난자당해 1932년 11월 20일 옥사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국으로 이송되어 개풍군 선영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