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화춘(李和春, 1871. 2. 4~1956. 7. 23)


만주 선교 개척자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원래 장단 출신이었으나 조부 때 개성 서부 저동으로 이주하여 숯장사를 하던 상민 계층으로 살았다. 그의 부친 이암석은 장사에 수완이 있어 개성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 성공하였다. 1901년 9월 기독교에 입교, 무스(J.R. Moose)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그 해 12월부터 전도활동을 시작하였고 사경회와 성경강습에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곧 매서인으로 순회 전도활동을 폈다. 1904년 9월부터 서울 청영교(淸寧橋)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이어 1905년 9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이천(伊川)구역장을 역임하고 이어 1908년 8월까지 1년 동안은 개성남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08년 9월 남감리회 선교연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았으며, 곧 북간도에 이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자원, 파송되었다. 이화춘 전도사와 매서인 이응현, 함주익 등 3명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어려운 여행끝에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중국인 유지의 재정적 도움에 힘입어 전도활동을 시작하자 점차 교인도 늘기 시작하였다. 당시 용정촌에는 약 1백 30호의 한국인이 거주하였는데, 특히 애국지사 박무림(朴茂林)이 열심히 교회 일에 협조하였다. 용정촌을 선교기지로 인근 촌락 9개소의 예배처에 약 5백여 명의 교인을 얻어 날로 부흥케 되었다. 그러나 곧 장로교와 감리교 양 교파 사이에 이루어진 선교지역 분할협정에 의해 용정지역이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지역으로 이첩되어 캐나다 선교사 푸트(W.R. Foote, 富斗一)와 김영제(金永濟) 목사가 용정에 부임하였다. 이에 이화춘 전도사는 감리교회의 전도 실적 일체를 인계하고 귀국하였다. 1909년 9월부터 강원도 철원구역장으로 교회를 시무하면서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수학하고 1911년 12월 20일 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이어 1912년 9월 8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개성남부교회에서 3년간 시무하고 1915년부터는 금화구역장, 1916년 9월부터는 개성북지방 순행목사, 1918년 10월부터 1924년 8월까지는 서울 순행목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9월 다시 북간도로 가서 북간도지방 관할 목사로 8년 동안 용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다시 귀국하여 내금강교회에서 휴양하면서 시무하였는데 건강상 이유로 요양하다가 1934년 정년은퇴를 하였으며 1956년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노득과의 사이에 3남 1녀가 있다.

-논문:\"신도와 학자 사이에 문답한 것\", 〈그리스도회보〉, 1912. 9. 15.

-참고문헌:이태산, 《이화춘 목사의 생애》,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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