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호운(李浩雲, 1911. 5. 3~1969. 1. 25)


신학자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부친 이민조와 모친 최일구 사이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만주 용정의 영신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3월 24일 졸업과 동시에 차경화와 결혼하고 동부연회 춘천지방 화천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 후 서부연회 해주지방 옹진으로 옮겨 마산구역을 담임하다가 옹진읍교회에서 시무하고 1939년 3월에 준회원에 허입하였으며 연회 해산 직전인 1941년 3월 9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친일 교단을 반대하는 의미로 옹진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에서 청강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해방을 맞기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5년 9월부터 평양 성화여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시무하였다. 이듬해 교회 측의 기념예배와 동시에 진행된 3.1절 기념대회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호운 목사가 그 배후로 지목되어 일경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석방된 후 곧바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쿠퍼(K.E. Cooper) 선교사가 서울 충정로의 옛 여자신학교 건물에서 개설한 \"보혜성경학원\"에 교사로 참여하였고, 1947년 4월부터 서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미감리교에서 제공하는 십자군 장학금을 받고 1949년 9월 도미하여 에반스톤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51년 9월 달라스 소재 남감리교대학교 퍼킨스신학대학원 3학년에 전입하여 1952년 6월 졸업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감리교사, 교리사, 교회인물사 등 교회사 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남녀 서리 교역자와 신학을 공부하려는 평신도를 모아 신학을 가르친 전수과가 1953년 9월 21일 설치되자 과장으로 쿠퍼 목사와 함께 전수과를 담당하였다. 1956년 9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전임하였고 1958년 4월 11일에는 목원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농촌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68년 12월 15일 신경성 고혈압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혼수상태로 세브란스병원에 누워 있다가 40일 만인 1969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목원대 내부 분규 등이 요인이 되었다). 1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그는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은혜받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이용도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0년 봄 간도 용정 부흥회에서였다. 그 후 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에 와서 몇 개월간 현저동 이용도 목사 집에 머물면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요구하지 않사오며 주께서 지고 가는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골고다까지라도 가기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 지금 목사님이 지신 십자가를 저도 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렵니다. 주님 위하여 일하고 살고 죽기를 원합니다.\"(1932년 6월 25일 이용도 목사에게 보낸 편지)

이러한 그의 약속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농촌에 들어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적인 어용교단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훼손되는 일이 나타나자 신앙 양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목회를 그만두고 농촌에 묻혀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이 후진 양성도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이것이 자신의 명예나 출세를 위한 길이 아님은 찬송시 355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에 잘 나타나 있다. 1950년 개렛신학교 유학중 주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리라는 신앙고백으로 지은 이 찬송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어진 찬송가로서 신학교에서는 교가처럼 불리던 것인데 1967년 개편찬송가에 수록되면서 일반에 보급되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주님 중심의 신앙체계\"(민경배)를 표현한 이 찬송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애창되고 있다. 그와 함께 목원대학에서 일했던 조석환 교수는 이호운 목사를 가리켜 \"부름받은 몸이란 찬송가대로 사신 분\"이라 했다.

1. 부름받아 나선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그리고 〈감리교생활〉에 교회를 빛내는 인물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모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전금주 권사, 조기호 목사, 황영호 목사, 허태행 권사, 시율린 목사).

박대선 총장이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이호운 학장은 꿈의 사람이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꿈을 지닌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항상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열정적이었고, 예언자처럼 교회의 부패상을 질타하기도 했다. \"큰 교회 가려고 넘실거리는 너절한 목사가 되지 말고 꿈을 가진 그리고 신념 있는 목사가 되라\"고 부탁하였다(김상봉 목사). 특히 농촌 목회에 대한 꿈을 학생들에게 심은 것으로 유명하다. 박봉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포플라 나무를 심어 몇 년만 기다리면 얼마나 크게 자라고, 소를 키우면 얼마나 농촌이 발전할 수 있는가\" 등으로 밤늦게까지 대화하였기에 \"이대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한다.

이러한 농촌에 대한 꿈은 목원대학으로 전임하면서 서서히 실현되었다. 그는 10년 후인 개교 10주년 기념행사 기념사에서 그 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흙에 개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상은 \'복음을 흙에 개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로 초연하고 성별된 사람들이라 해서 은근히 허세를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교역자를 기르기보다는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친구와 일꾼을 기르렵니다.\"(1964. 5. 5)

위의 기념사에 나타난 것처럼 그의 사상은 \"꿈(복음)을 흙 속에 민중과 함께 생활로 드러내는 것\"(《목원신학 반세기의 발자취》, 88쪽)이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이호운 학장을 나는 \"꿈을 가진 농촌운동가\"로 표현하고 싶다. 그는 정말 목원의 개척자로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불도저\"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굽힐 줄 모르는 용기로 학교행정을 처리하여 1965년에는 대학인가를 받아냈고, 수십만 평의 계족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35만 주의 낙엽송과 각종 나무를 심었다. 성산목장, 실습농장을 가꾸어서 목원대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3년간 4백여 명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의 회고에서처럼 \"마치 딸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성의를 학교를 위하여 시간과 지혜와 정력을 바쳤다. 그리고 학교가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학교가 입을 피해를 보고 슬퍼했다. 학교는 나의 기쁨, 슬픔, 사랑이었다. 학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학교가 나의 재산, 나의 영광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욕심은 없었다.\"(\"학교를떠나는 마음\", 〈대전신학보〉, 1968. 12)

-저서:《주께 바친 생애》(쿠퍼 목사전), 총리원교육국, 1960;《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양주삼 박사), 감리교대전신학대학 출판부, 1965;《한국교회초기사》, 대한기독교서회, 1970;《개신교입문》(역);《신교와 구교와의 다른 점》(역), 1958;《예언자연구》(역);《크리스마스 사료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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