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창주(李昌周, 1877. 6. 30~1950 ?)


수난자

평남 용강군 귀성면 금정리에서 출생. 1885년부터 10년간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5년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7년 감리교의 무어(J.Z. Moore, 文約翰)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04년 함종면 함일(咸一)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봉직하였고 1907년 삼풍(三豊)학교 교장으로 3년간 봉직하였으며 1910년 숭실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하였다. 1913년 미감리회 전도사로 임명받아 삼화(三和)구역에서 목회를 시작하는 한편 삼광(三光)학교 및 중흥(中興)학교 교장도 겸임하였다. 1918년 중화(中和)구역으로 옮겨 시무하면서 석양리(石楊里)교회, 검암리교회, 후장교리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였으며 1921년 10월 2일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2년 덕동구역으로 전임하여 시무하면서 사립 집성학교를 증축하였고 1925년 3월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21일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7년 다시 삼화구역으로 옮겨 시무하면서 교회 내 유치원을 신축하였고 1930년 신정구역으로 전임하였다. 1934년 증산구역으로 옮겼으며 창신학교 이사장으로 선임되어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고 강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38년 4월 증산교회에서 그의 성역 25주년 기념예배가 성대하게 베풀어졌는데 당시까지 그에게 학습을 받은 자가 8백 90여 명, 세례받은 자가 7백 89명에 이르러 교회에서 높은 치하를 받기도 하였다. 1941년 진남포교회로 옮겨 시무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고 6.25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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