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윤영(李允榮, 1890. 8. 19~1975. 10. 15)
평북 영변에서 이용필(李龍弼)의 장남으로 출생.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곧 이 땅이 해방되기 전에 몸담았던 목회와 해방 후 헌신한 정치는 그의 삶의 중심축이었다. 1896년부터 1905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여 12살이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1907년 영변 숭덕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앙YMCA에서 토지측량법을 배웠다. 1912년 평양 숭실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평북의 회천, 태천 등지에서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는데 태천 창명학교 및 운산 광동학교, 순천 일신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14년 목회에 뜻을 두고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진학하면서 목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태천교회, 북진교회 전도사로 취임하였다가 1917년 6월 24일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곧 신창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황해도 연백군 백천교회(1921~1927)에 봉직중이던 1922년 협성신학교를 제8회로 졸업하였으며 1927년 신흥리교회 및 진남포지방, 1931년 부부교회 및 개성지방, 1935년 남산현교회 등지로 전임하였다. 그러나 평양지방 감리사직을 겸직하던 1941년 3월에 일제 침략 만행에 대해 항거하다가 1942년 평양 요한학교 이환신 목사와 함께 친일교단 지도자에게 목사직을 파면당했다. 그 동안 그는 평양 광성중학교, 정의여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영변 숭덕중학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정진여학교 등의 이사로 10여 년 동안 활약하였고, 감리회 총리원 사회국장, 기독신보, 기독교서회, 평양기독병원의 이사로도 활약하는 한편 평양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조선교회 일본기독교 합동위원의 자격으로 도쿄에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합동 반대를 주장하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전후로 선교사들이 강제 귀국할 때 선교부 재산관리사로 일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어용기관인 조선혁신교단 창단을 반대하였다가 경기도 경찰부에 검속당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조만식을 보좌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지방부장으로 취임하였고, 소련군 진주 후에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어 1946년 1월 조만식, 김병연, 박현숙 등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 해 2월 밀사를 파견, 하지 중장과 이승만, 김구에게 서북 조선에 관한 시국 메시지를 밀송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감리교 재건에 몰두,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지에 1백여 교회를 재건시키고 서부연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정치적 활동으로는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1946년 2월까지 1백 50여 처에 지부를 결성하는 등 정치활동에도 눈부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산세력의 위협과 방해로 월남하기에 이르렀고, 이후로 목회생활을 떠나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1948년 5월 유엔 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된 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서울 종로갑구)이 되었으며, 그 해 5월 31일 온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 중앙청 회의실에서 최초의 국회가 개회될 때 개회기도를 맡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무임소장관, 사회부장관, 국무총리서리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 11월에는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재건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재헌국회의원의 임기가 끝난 1953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 학장으로 대학 교육에 공헌하였고, 1963년에는 반공통일연합회 위원장을 거쳐 1969년 군정연장 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및 통일원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피난학교 시절 광성고등학교 재건에도 참여한 후 평생이사로 봉사한 그는 1975년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저서:《白史 李允榮 回顧錄》, 史草,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