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수산나(李壽山羅, ?~1941. 2)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기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고 결혼하여 살던 곳은 평양이었다. 평양에는 1887년 4월에 아펜젤러가 다녀간 후 여러 선교사들이 방문했으나 본격적인 선교는 1892년에 시작되었다. 1892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선교연회에서 평양 개척 선교사로 의사인 홀(W.J. Hall)을 임명하였다. 이에 홀은 9월 30일 평양에 도착하여 여관에 머물면서 환자들을 진료하여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돌아왔다. 1893년 2월에 노블(W.A. Noble)과 함께 다시 평양에 가서 이번에는 한국인 조사를 내세워 성내에 집 두 채를 구입하고 본격적인 진료활동을 개시했다. 감리교회의 평양 개척에 참여한 한국인 교인들은 조사인 김창식(金昌植)과 통역 노병선(盧炳善), 어학선생 황정모 등과 평양 출신 이항선\"김낙선 등이었다.
이수산나는 1894년 당시 아직 예수를 믿기 전이었지만 그녀의 시동생인 오석형은 일찍이 예수를 믿고 김창식과 미국 선교사 홀 의사를 자주 상종하였으므로 당시 평양교회 형편과 김창식, 이항선, 오석형의 핍박받던 일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시동생 오석형은 형과 가산을 나누어 강서 피모루라는 곳에 살다가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평양으로 다시 왔다가 도망하려는 것을 이수산나의 남편되는 형이 잡아 자본을 구해주어 약국을 경영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미국 선교사 홀 의사를 알게 되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이전에 잘못한 것을 슬피 자복하고 그 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며, 홀 선교사는 그에게 약을 주며 팔게 하였고 집도 사서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평양교회의 핍박은 1894년 2월 음력 정월을 맞아 동리 발피(潑皮) 김낙구라는 자가 마을을 돌며 우물제사를 지낼 비용을 걷다가 홀의 통역인 노병선에게 거절당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마을 공동제의에 참여하지 않은 선교사 집은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5월에 홀은 부인과 갓난아기를 서울에서 데려왔다. 백인여자와 아이를 처음 본 평양 주민들이 떼지어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이 같은 소동이 일자 김낙구와 일행은 평안감사에게 \"이교를 수입하여 다수의 양민을 유혹하게 하며 외인으로 협잡하는 류를 방지하여 금지\"하도록 요청하였고, 이에 평안감사는 \"서양 사람은 잡을 수 없은즉 조선 교인만 잡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1894년 5월 10일에 김창식과 오석형, 그리고 이항선 등이 체포되었고 교인들에게 집을 판 사람들까지 체포하였다.
체포된 교인들은 외국인 선교사와의 관련 여부에 대해 집중 심문을 받았고 나중에는 배교하면 석방하겠다는 식으로 천주교를 박해했던 심문방법을 썼다. 그러면서도 선교사집으로 사람을 보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교인들을 석방하기 위해 감사를 만나려 했으나 면담을 거절당한 홀은 이 사실을 서울에 있는 스크랜턴에게 전보로 알렸고 스크랜턴은 다시 영국 총영사와 미국 총영사에게 알렸다. 이에 미국\"영국 총영사는 평양 사건에 대해 조선 정부에 항의했고 외아문(外衙門에)에서는 평양 감영에 교인들의 석방을 종용하는 전보를 쳤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던 평안감사는 2차에 걸친 외아문의 전보를 받고 나서야 5월 11일 오후에 교인들을 석방하였다. 이것은 지방에서의 교인박해가 선교사들에 의해 공사관에 알려지고 공사관에서는 조선 정부에 항의하고, 조선 정부는 교인박해 중지를 지방 관리에게 명령하였으며 이에 지방 관리는 복종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이는 외국 공관의 치외법권적인 힘과 영향이 선교사와 교회에 적용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평안감사가 할 수 없이 교인들을 내어주었지만 폭도들은 교인들이 옥에서 나온다는 말을 듣고 옥문에 모여 \"텬쥬확쟝이 때려 죽여라\" 소리를 지르며 돌팔매질을 함부로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김창식은 돌팔매에 중상을 당하고 석달이나 치료한 후에 소생되고 이수산나의 시동생 오석형은 이수산나의 시아버지가 삿갓으로 그를 가리고 빨리 나옴으로 경상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시동생과 그 함께 한 교인들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이수산나는 이들이 걱정되어서 무당에게 점을 치러 갔다. 홀 의사의 부인이 시동생 오석형의 집을 찾아와서 여러 가지로 동서를 위로하고 약간의 돈을 주고 갔다는 말을 듣고 그 돈 중에서 얼마를 달라고 해서 무당을 찾아간 것이다. 무당은 \"그가 나라 법을 어겨 죽게 되었지만 집안에서도 그와 같이 애를 쓰니 굿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이수산나가 즉시 무당을 집으로 데려다가 굿거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오석형이 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시동생 오석형은 집안에 음식이 벌어진 이유를 듣고는 성내며 \"그래 홀 부인께서 준 돈을 가지고 마귀짓을 하십니까? 아주마님께서도 그 같은 허황한 짓을 이제부터 그만두시고 예수를 믿으시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수산나는 을미년 정월 1894년 12월경부터 예수 믿기를 작정하였다. 시동생의 \"허황된 일을 그만두고 예수를 믿으라\" 하던 말이 깊이 찔려 말도 못하고 있다가 하나님께 고개를 숙일 생각이 나서 비로소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평양 여자로는 이수산나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는 여인들이 삿갓을 쓰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수산나가 예수를 믿은 이후로 많은 여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어 각 교회에는 구석마다 삿갓이 산과 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수산나의 남편은 원래 누룩장사를 하였는데 그가 예수 믿기를 작정한 후에 즉시 술과 담배는 끊었으나 술의 원료인 누룩장사는 옳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였다. 그 일을 그만두면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블 감리사의 권유로 그 영업을 그만두기로 뜻을 정하고 모든 식구들의 장래생활을 온전히 하나님께 부탁하고 세례를 받은 후 감리교회의 입교인이 되었다.
그 남편은 이수산나와 함께 운산으로 파송되어 전도하러 가기도 하였다. 이때 이수산나는 홀 부인의 파송을 받았고, 그의 남편은 노블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떠났는데 한번 전도하러 나가면 달이 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수산나는 산골에서 혈혈단신의 몸으로 갖은 시험과 핍박을 받은 적이 많다고 한다.
1930년 6월에는 고양군 숭인면(현 서울 동대문구) 신설리 김정식 여권사 자택에서 주정국 목사 등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곳에 신설리기도처를 시작하였으며 그로부터 10개월 후 1931년 신설리교회(현 보문제일교회)를 이루었다. 1941년 교역중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