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배세(李培世, 1892. 8. 12~1969. 2. 5)


여선교사

충청남도 마산군 영치면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충남 배영여학교를 졸업했고 1920년 3월 감리교여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4월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21년 4월 천안지방 및 충북 진천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으며, 1922년 9월 충남 공주교회로 전임되었다. 1924년 10월 충남 강경리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충북 진천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미감리회에서는 이배세를 1927년 북만주지방 신경(新京)에 파송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교회 안에 유치원을 설립하고 2세 교포들의 유아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는데 여선교회 대회는 이 신경유치원에 매월 20원씩 보조하여 여선교회 사업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1928년 사평가(四坪街)교회로 옮겼는데 그곳에서도 부임하자 곧 주일학교를 설립하여 교회 발전의 기틀로 삼고자 하였다. 1929년 잠시 길림교회로 옮겼다가 1931년에 다시 사평가로 부임했는데 그가 목회할 당시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1932년에 공주령(公主嶺)교회에 부임하여 5년간 시무했는데 이곳에서도 교회당 건축에 착수하여 1938년 5월, 35평 중국식 벽돌예배당을 헌당하였다. 이 공주령교회 건축을 위해 그는 국내외 교인들을 대상으로 모금했는데 여선교회 대회에서도 1937년 대회에서 60원을 보조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이 같은 만주 선교의 공을 기려 만주선교연회는 1937년 6월 27일에 용정북부예배당에서 이배세 전도사 만주 선교 10주년 기념식을 베풀고 표창했다. 이에 대한 〈감리회보〉의 기사 속에서 그의 헌신과 수고를 느낄 수 있다.

\"1927년 9월 9일에 조선 여선교회의 선교사로 만주 장춘에 나려 남북 만주를 무대로 동분서주하여 개척자로 또는 선구자로 춘풍추우 10여 성상을 만주선교에 헌신한 이배세 전도사의 만주 선교 10주년 기념식이 오는 6월 26일(실지는 27일)에 용정서 열릴 것이다. 그는 만주에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고 수성하기 위하여 눈물과 땀을 흘린 결과 그의 청춘은 늙었고 그의 정력은 쇠퇴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아직 만주교회를 위하여 힘을 다하는 중이니 공주령에 예배당 하나 작만하기 위하여서 만주와 조선을 다니며 애쓰는 것은 누구나 동정아니리 없을 것이다.\"

공주령교회 건축을 마친 이배세는 1938년 고유수(孤柳樹)교회로 옮겨 역시 그곳에서도 부임하자마자 엡윗청년회, 하기아동성경학교, 남ㆍ여선교회를 조직하고 교회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청년ㆍ학생ㆍ아동층을 조직하고 교육시키는 일에 힘썼으며 교회 건축에도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만주 선교만큼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우리 손으로 먼저 시작하였다. 한국인 목회자들의 희생적인 봉사로 만주 선교가 본 궤도에 올라선 후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갔다. 외국인 여선교사로는 1928년에 데밍(C.S. Deming) 부인이 남편을 따라 북만주에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만주 상황은 기근과 타락, 약탈과 불안이 점철된 어려운 상황이었다. 유랑민으로서 한국인 교포들이 겪어야 할 무시와 천대는 말할 것 없고 민족적 자존심도 없이 자기 파멸의 삶을 살고 있었다. 1930년 이매련의 보고다.

\"주위에 고통이 불일 듯이 일어나고 죽엄이 문턱에서 기다릴지라도 이것을 아지 못하고 도덕으로나 예의로나 모든 것이 부패하여 갈 뿐 아니라 민족적 관념도 일점 찾아볼 수 없이 중국인과 같이 굴며 심한 교제로서 나중에는 식구도 알지 못하고 가정에 모든 것을 다 팔아 먹다 못하여 마피상이 되어 뼈만 남은 형상의 헌 옷으로 거리에서 죽고 맙니다. 짐승도 제 동족을 알고 개나 도야지도 기르는 주인이 있으니 우리들은 돌아보고 인도하는 이가 없는 것을 생각할 때 낙망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께서 계심을 믿고 많은 위로를 얻게 됩니다.\"

만주 선교가 갖는 특별한 의미가 여기에 있다. 만주 선교는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전도라기보다는 국내에서 신앙생활을 했다가 만주에 가서 타락하여 신앙을 버린 낙심자들을 찾아 다시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도덕적 타락의 현상은 일반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었다.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여 교포 사회의 부패와 타락을 방지할 수 있는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만주 선교사들의 주요 임무였다.

이배세는 1944년 만주를 떠나 귀국하였다. 그러나 여선교회는 계속적으로 박순신, 이매련, 이복녀, 남경순, 이리심 등을 선교사로 보내 해방되기까지 만주 선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인천지방 자월도ㆍ소무의도감리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46년에는 대무의도에 파송되어 전도하여 신자를 수십 명 얻었으며 떼무리교회도 겸임하여서 목회하였다고 한다. 그가 대무의도에 파송될 당시 55세의 나이였다. 이배세의 대무의도 파송은 일제시대 여선교회의 국내선교를 회복하고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1947년 충남 아산읍 개척교회, 그의 나이 육십에 다다른 1951년에는 북제주도 월정리 개척교회, 1952년 제주도 함덕리 개척교회, 1955년 북제주도 광양교회, 1956년 4월 천안지방 직산역전교회 등지에서 시무하다가 1958년 선교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 후 정릉 안식관에서 생활하던 중 1969년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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