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동녕(李東寧, 1869. 9. 2~1940. 3. 13)


독립운동가. 호는 석오(石吾)

충남 천안군 목천면 동리에서 경북 의성 군수와 영해 부사를 지낸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10세에 사서삼경을 통달했고, 1892년 24세에 국가시험인 응제진사에 합격하였다. 이후 기울어져 가는 망국의 현장을 목도하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준ㆍ이승만 등과 함께 투옥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02년 이상재ㆍ전덕기 등과 함께 YMCA운동을 전개하였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 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결속한 상동청년회에 가입, 김진호ㆍ양기탁ㆍ이회영ㆍ이시영ㆍ김구 등과 함께 민족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대한문 앞에서 무효상소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북간도로 건너간 그는 이상설ㆍ여준ㆍ정순만ㆍ박무림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후 1907년 10월 폐교)을 설립하고 교포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인 1907년 귀국한 그는 4월경 양기탁ㆍ전덕기ㆍ이동휘ㆍ이갑ㆍ유동열ㆍ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중앙회 총서기로 활동하면서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총무로도 활약하였다. 또한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상동청년학원 교사로도 재직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항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제2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을 결의, 이에 이동녕ㆍ이회영ㆍ주진수ㆍ장유순 등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돌아왔다. 그 해 10월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 이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해외와 국내로 나뉘어 투쟁하기로 결의,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그를 비롯한 이회영 6형제ㆍ이상룡ㆍ김창환ㆍ여준 등 1백여 명이 가족들과 더불어 만주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항일독립단체이자 한인교포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었다(곧 통화현 합니하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함). 경학사는 이후 부민단(扶民團) → 한족회(韓族會)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발전하였고, 신흥강습소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동녕은 신흥강습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 교육에 매진하였다. 또한 안동식, 이윤옥, 김창무 등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매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를 설립하였으니, 곧 만주 유하현 삼원보교회다.

1913년 초 일제 형사대가 파견되었으니 피하라는 연락을 받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이상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 권업회(勸業會)에 참여, 〈권업보〉ㆍ〈해조신문〉을 발행하는 등 교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이 무렵 민족종교 대종교(大宗敎)에 입교하였고, 1914년에는 이상설과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 탄로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만주와 노령에서 이회영ㆍ이시영ㆍ황공달ㆍ문창범ㆍ황상규ㆍ이범윤ㆍ김좌진ㆍ박찬익ㆍ윤세복ㆍ김동삼ㆍ여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3.1운동 직전인 1919년 1월 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4월 10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추대되었으며, 곧이어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이 되어 임정의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정부의 기구가 확고해지자 그 해 10월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와 \"남녀학생에게\"란 제목의 밀서를 국내에 발포하였다.

1920년에는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확장 개편하고, 인성학교(仁成學校) 기금 마련을 위해 헌신하였고, 1921년에는 이승만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이동휘가 임정을 탈퇴하자 그가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뒷수습에 전념하였다. 그는 파벌싸움으로 임정이 위기에 처하자, 1922년 내무총장이 되면서 홍진ㆍ안창호ㆍ여운형ㆍ도인권ㆍ차이석ㆍ노백린ㆍ김구ㆍ이시영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동지들의 결속을 도모하였다. 1924년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군무총장을 겸임하였으며, 9월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리하다가 1925년 이승만이 탄핵받아 대통령에서 면직된 후 박은식에게 물려주었다. 1926년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됨으로써 국무령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고 법무총장도 역임했다.

1929년 그는 민족 진영의 단결을 위해 공산주의자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김구ㆍ조완구ㆍ조소앙ㆍ홍진ㆍ이시영ㆍ이유필ㆍ안창호ㆍ백기준ㆍ엄항섭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였고, 이사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에는 재차 의정원 의장으로 추대되었고 임정 주석, 법무총장을 겸임하였다.

1932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거사 후 일제가 혹심한 사찰과 탄압을 가해오자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 거처를 전전하였고, 1935년에는 이시영ㆍ김구ㆍ조성환ㆍ조완구ㆍ송병조ㆍ양우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하고 당수로 선출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임시정부의 외곽 연합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결성에 참가, 항일전에 투신하였고 이 당시 중화민국 정부가 중경(重慶)에 천도하자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하였다.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1940년 3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사천성(四川省)에서 급성폐렴으로 타계하였다. 그는 민족진영의 대동단결과 정당의 통합을 유언으로 남겼다.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광복 후 1948년 9월 22일 유해가 무언환국, 경교장에서 김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하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미망인 김경선 여사는 1894년 이동녕과 결혼한 후 1910년 서간도에 함께 망명갔다가 1913년 고국으로 귀환하여 줄곧 국내에 거주하였으며 원산 상리교회, 서울 종로구의 묘동교회 권사로 봉사하다 1964년 8월 29일 별세하였고, 남편과의 사이에 2남 2녀(장남 의식, 장녀 의정, 차남 의백, 차녀 의신)의 자녀들을 남겼다.

-참고문헌:김석영, 《선구자 이동녕 일대기》, 을유문화사, 1979;김석영ㆍ이현희, 《석오 이동녕 연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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