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경숙(李慶淑, 1851~1930. 1. 9)


전도부인

이경숙은 1851년 충청도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출생하였다. 열 다섯 되던 해, 병인교난으로 한창 시끄러울 때 그는 서울에서 내려온 낯모르는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 남자는 처갓집에서 초례를 지낸 후 바로 서울로 돌아갔고 그 후 소식이 없다가 3년 후에야 시집으로부터 그가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그때가 1869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초례 때 잠깐 본 남편의 얼굴과 인상이 그의 결혼생활 전부였다. 남편 없는 결혼생활 3년에 변한 것이라곤 그의 댕기머리가 쪽진머리로 된 것과 그의 친가가 친정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그 후 가난한 친정집 살림을 도우며 어려운 생활을 견뎌야 했다.

한때 부친이 \"군사마\"(軍司馬)란 말단 벼슬을 하면서 받던 녹(祿)마저 중단됨으로 가정은 다시 경제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가족들은 친척집으로 흩어지는 방법을 통해 생존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37세, 1888년의 일이었다.

불운의 과부 이경숙은 서울로 올라와 삼촌댁에 머물면서 바느질, 빨래 등의 일을 하며 힘들고 서러운 인생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경숙은 39세 되던 해에 지난 세월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삼십구세 지난 역사는 실로 인간고의 여실한 기록이라 하겠다. 나는 서울 와서 산지 3년 후부터 건널수록 물이오 넘을수록 산이 있는 나의 쓰리고 아픈 생애를 비관하기 시작하였다.\" 좌절과 고독의 나날이었다. 한때 중노릇까지 해 보려고 생각했던 사실 때문에 훗날 일부 선교사들은 그가 중이 되었다가 환속한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갈등과 번민의 나날을 보내던 중 우연히 친척을 통해 서양 선교사를 소개받게 되었다. 바느질하러 간 어느 친척집의 바깥주인이 미국에서 온 선교사의 조선어선생으로 있었는데 그 선교사가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스크랜턴(M.F. Scranton) 대부인이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어학선생을 통해 불우한 과부 이야기를 듣고 그를 자기 집에 초청하였다. 스크랜턴 대부인과의 첫 만남에서 이경숙의 마음은 녹아버렸다. 조선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가난한 집 과부를 가장 귀한 손님으로, 사랑스러운 딸로 맞이하고 대접하는 낯선 선교사의 태도 속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40여 년 고난과 고독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크랜턴 대부인과의 생활을 통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그가 스크랜턴 집에서 하는 일이란 대부인의 개인적 집안 일 외에 이화학당 일도 돕는 것이었다. 스크랜턴 외에 로드와일러(L.C. Rothweiler)가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경숙이 합류하게 되었고 이경숙은 주로 한글을 가르쳤으며 남성 교사를 구하기 어려워 한문까지도 가르쳤다. 학교 일 외에 이경숙이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서양인을 구경하러 오는 조선 여성들을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四월 八일, 五月 五日이면 쟝안 부녀자들이 각처 사찰이나 남대문 밧과 동대문 밧 관왕묘나그 밧게 여러 곳으로 도라다니며 구경하는 풍속이 잇는대 맛침 그 해 四월 八일(음력)이 되니 서양부인이 나와서 사는 모양과 집구경을 하겟다고 쟝안 남북촌 부녀들이 혹은 교군도 타고 또 쟝옷도 쓰고 오는 이들이 로부인의 집으로 구름갓치 모혀 들엇다. 나는 천여 명이나 되는 그들을 안내하야 이리져리 다니면서 설명하기에 하루동안 졍신이 업시 지낸 일도 잇다.\"(《승리의 생활》, 56쪽)

그는 자기가 보고 이해한 서양인과 그들의 삶을 조선 여인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직도 \"영아소동\"으로 인한 오해와 반감이 사라지지 않았던 때에 선교사들의 생활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예상대로 선교사 집을 구경하고 간 조선 부인들은 폐쇄적인 태도를 버리고 이화학당에 학생들을 보내기 시작해 이경숙이 처음 이화학당에 들어갔을 때 학생 6명이었던 것이 그 해 8월에는 80명으로 늘어났다. 멀리 시골에서 올라오는 학생들의 숫자도 점차 불어났다. 이경숙은 그 해(1890) 9월에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드루실라(Drusilla)라는 세례명도 얻었다.

1896년 스크랜턴 대부인이 신병으로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이화학당은 로드와일러가 책임지게 되었다. 새로운 학당장은 모든 일을 규칙대로 처리하려 하였다. 로드와일러의 학교 행정은 불우한 형편에 있던 교사 이경숙이나 고아 출신 학생들에게는 무리한 감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이화학당을 떠나게 되었다.

마침 건강을 회복한 스크랜턴 대부인이 1897년 다시 조선에 나오자 이경숙은 주로 스크랜턴 대부인을 도와 그의 집으로 찾아오는 여성과 아이들을 가르치며 전도하였다. 그러다가 1902년부터 스크랜턴 대부인과 동행해 서울을 벗어나 지방을 순회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그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신앙의 어머니, 그를 불행과 좌절에서 구해 준 스크랜턴 대부인이 신병으로 그 해 10월 8일에 별세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지난 1896년의 경우처럼 스크랜턴 대부인이 없음으로 해서 불안해하거나 교회 일에서 떠나려 하는 심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성숙한 전도인이 되어 있었다. 스크랜턴 대부인 후임으로 피어스(N.M. Pierce)가 내한하여 달성교회당 전도부인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피어스는 이경숙을 선교사업이 정착되어 가고 있는 수원지방에 파송하였다. 수원 종로교회의 여선교회 사업과 교회에서 설립한 삼일여학교 교육사업이 그에게 부과된 업무였다. 그는 전에 스크랜턴 대부인과 순행하며 들렀던 수원으로 주거를 옮겨 1년 동안 활약하였는데 10명 미만이던 교인 수가 70여 명에 이르렀고 2명밖에 없던 학생 수가 20명으로 늘게 된 것은 그의 뛰어난 활약의 결과였다. 특히 그가 정신이상 된 40대 여인과 무녀(巫女)를 기도로 고치고 전도한 일이 알려지면서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선교사들 사이에는 \"귀신 내쫓는 여인\"으로 알려졌다.

1911년 그의 나이 60이 되던 해 그는 전도 일선에서 은퇴하고 상동교회 안에 있는 조그만 방에 머물다가 1930년 1월 9일 조용히 별세하였다. 은퇴할 때까지 받은 봉급과 은퇴 시 받은 축하금을 모두 모아두었다가 장례식 비용으로 쓰도록 배려하는 것까지 잊지 않았던 이경숙, 그는 그 불우했던 환경을 극복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교사라는 영광스런 자리에 오른 이 땅의 초기 신앙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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