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인물 DB 이강산(李康算, 1902. 3. 2~1990. 7. 20)
황해도 옹진군 부민면 천상리에서 부농으로 살던 아버지 이기춘과 어머니 유선형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하였을 때 해산 간호도 끝내지 않은 할머니가 사랑방으로 뛰어가 할아버지에게 손자를 봤다고 전하자 할아버지는 너무 기뻐 무릎을 치며 \"천하 제일 강산이 났구나\" 하고 외쳤다고 한다. 그때부터 아이의 이름을 강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강산의 집안 남자들은 대대로 유교에 젖어 내려오고, 여자들은 우상숭배와 미신 섬기는 일에 빠져 있었다. 예수교는 조상의 윤리와 도덕도 모르는 고약한 종교로 받아들였던 완고한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집안이 누가 권고한 일도 없는 예수교를 믿자고 동리 어른들을 모아놓고 여론을 만들기 시작했다. 학교를 세워 청년들에게 서양문화를 가르쳐주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고쳐주는 그 고마운 선교사들이 믿는 종교를 우리도 믿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강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해주에 사는 서양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마을로 와서 교회를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선교사의 이름도 모르고 주소도 몰라 그저 \"해주읍 미국 선교사 전\"이라고만 써서 보낸 편지가 잘 배달되어 며칠 후 선교사는 최일영 전도사를 파송해 주었다. 그래서 옹진군 내에는 처음으로 복음의 씨가 전해졌고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로 인해 이강산은 어린 시절부터 성경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이강산은 보통학교와 해주읍 부기학원을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가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하여 성경을 배우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그는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목회를 향한 여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16년 10월 29일 이강산은 14세의 나이로 부모가 정해준 대로 두 살 위인 장선양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기를 낳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와 집안에서는 목사를 그만두고 소실이라도 얻어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의 권고를 무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목회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강산은 어찌할 수 없어 엎드려 기도만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부인은 아들을 낳았고 그 뒤로 딸을 낳아 남매를 두게 되었다고 한다.
1928년 1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해주지방의 백천교회로 파송되어 목회를 시작하였고, 1931년 한국 감리교회 제1회 3부 연합연회에서 양주삼 총리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9년 3월부터 시작한 이강산의 목회생활은 1970년, 정년에서 2년 앞서 자원은퇴하기까지 41년간 계속되었다. 은퇴한 후에도 천안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으니 목회 연수 50년이 된다.
첫 목회지인 황해도 백천교회에서 시작하여 옹진, 서울 한성, 충청도 갈산, 삽교, 천안읍, 에베소 등의 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9년 옹진교회 시무중에 해주지방 감리사를 지냈고, 1941년에는 황해교구장 겸 조선 감리교단 재무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8.15 후 잠시 서울에서 한성교회를 개척 시무한 후에는 1953년부터 충남 갈산교회와 삽교교회에 시무하면서 충서지방과 예산지방에서 13년간 감리사를 지냈고 1967년 3월부터 2년간 남부연회 연회장을 지낸 후, 1970년 자원 은퇴하여 천안에서 에베소교회를 개척 시무하였다. 에베소교회를 시무하면서 계속해서 천안시내 신방교회와 신부동교회, 남산교회 등을 개척했다.
이강산은 부흥 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신학교를 마치고 첫 목회지였던 백천교회에서 목회에 실패한 후 폐결핵으로 몇 년 고생하였고, 이후 옹진교회 부목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러나 옹진교회 부목 파송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서울YMCA 농무부에서 주관하는 농민갱생운동에 참여하는 등 교회 주변사업에 힘쓰다가 해주교회에서 개최되었던 이용도 목사 부흥회에서 성령을 체험했다. 이후부터 1990년 별세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부흥사로서 한국 교회에 많은 공을 남겼다.
천안읍교회에서 시무할 때 천안에서 가까운 천원군 성거면에 성거산 기도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에베소교회에 시무할 때인 1978년 6월에는 망향기도원 원사를 건축하고 창립 및 8.15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강산은 에베소교회당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축 계획과 망향기도원 성전 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이루지 못하고, 1990년 7월 20일 별세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자기가 걸어온 일생을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의 성역 50년 역사에서 40년 부흥회 인도와 150여 교회 개척과 감리교 역사상 없는 감리사 30년 연임과 연회장 2년을 역임하였음을 큰 축복으로 안다. 더구나 감리교법 정년제의 70세이면 은퇴하여 원로목사는 주의 사역을 중단하고 있어야 하지만 나는 은퇴하여 새로운 목장을 개척케 하셔서 계속 주의 일을 하게 해 주신 하나님 은혜 감사하며 또한 몸도 건강하고 총명도 더하게 해 주시니 주의 일을 하는 자의 축복인 줄 믿는다.\"